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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Nov 01. 2020

사랑과 우정과 미래의 편지

우리의 세계로 들어가며

   생각해 보면 늘 무언가를 끄적rjflrh 있었다. 어딜 가든 가지고 다녔던 작은 수첩에, 생일 선물로 받은 자물쇠 달린 비밀 일기장에,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는 수학 시험지 뒷면에.

   나는 체육 시간만 되면 괜히 아프고 싶은 반에서 가장 조용한 여자애였다. 말보다 글이 편하고, 친구보다 책과 가까운. 말을 아끼면 내 안에 이야기가 쌓였다. 그대로 두니 마음이 자꾸 무거워져서 덜어내듯 뭔가를 썼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수첩 대신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가 가장 성실하게 했던 일이다.

   말 그대로 시시콜콜한 일상의 기록일 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둘씩 독자가 생겼다. 하루는 싫어하는 선생님에 대한 험담을 일기에 잔뜩 늘어놓았다. 몇 시간 뒤, 서로 얼굴만 알고 지내던 친구의 친구가 불쑥 댓글을 남겼다.     

  

   그동안 얘기 안 했는데 니 일기 너무 재밌어서 맨날 보러 와 ㅋㅋㅋ     

  

   기뻤다. 뿌듯했다. 행복했다.

   누가 내 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는 게 이렇게까지 기분 좋을 일인가? 그러면서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금 다른 마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햇다.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독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지만 한 번도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작가가 되기에 내 삶은 너무도 평범했다.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삶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 영화를 배웠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시나리오 수업이었다. 세상에 없는 인물을 만드는 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매 수업마다 벅차고 설렜다. 나는 좋은 이야기를 쓰는 감독이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더 큰 내가 되어 더 많은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되지 못했다. 나는 끝까지 남의 삶을 빌려 내 얘기만 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을 접은 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어떤 사람의 글을 읽게 됐다. 나와 동갑인 한 여자애가 쓴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 애가 인스타그램에 올려 놓은 백몇 편의 글을 밤을 꼬박 새워가며 전부 읽었다. 우리는 분명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은데 그 애가 쓴 모든 글에 내가 있었다.

   끝까지 읽고 나니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이 마음을 누구에게든 전해야만 할 것 같아서 아주 긴 메시지를 썼다.     

  

   그리고 그걸 그 애에게 보냈다.

   그게 내가 이슬에게 쓴 첫 편지였다.


   그 뒤로 우리는 어찌어찌 친구가 되었다. 어찌어찌. 네 글자로 간추린 그 과정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10년도 되지 않은 이 우정이 나는 너무 익숙하다.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전생에도 우리였던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때도 MD에 마이크를 달아 친구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곤 했다. 결국 크면 대단한 게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거구나 싶다. ㅡ『이만큼 가까이』 정세랑, 창비, p.44     

  

   애초에 하던 걸 본격적으로 시작한 뒤 나는 자주 스스로를 의심했다. 내가 글을 써도 될까? 계속 쓸 수 있을까? 마음이 흔들릴 때면 사랑하는 책들을 다시 꺼내 다시 읽었다. 읽고 나서는 이슬과 긴 수다를 떨었다.     

   책에 대해서라면 이슬은 관대했다. 어떤 책이 얼마나 좋은지, 어떤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호들갑을 떨어도 핀잔을 주는 일 없이 들어주었다. 그러다 가끔은 한술 더 뜨기도 했는데, 우리의 책 취향이 드물게 겹치는 그 순간이 황홀하게 즐거웠다.

  

   책에 대해 말하며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한다. 사랑과 우정에 대해. 돈과 가족과 미래에 대해. 여기 모인 편지에는 우리 세계의 모든 말이 담겨 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서,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우리는 계속 긴 편지를 쓴다.


   

   (하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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