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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세라 Nov 15. 2019

사랑의 맹세보다 함께하겠다는 약속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고

그대에게 끌린다. 설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허벅지를 꼬집고 고개를 흔드는 것.

난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 이 설렘 위험하다.

이 감정은 마치 MSG에 홀려 정신없이 라면을 먹고 난 후, 남겨진 라면 국물을 볼 때 밀려오는 죄책감과 같다.

본능에 이끌려 통제불능이 되어 반응하고 이내 가동된 두뇌가 흩뿌리는 좌절감.

난 이제 끼 부릴 처지가 아니다.


결혼을 한 지 5년 차. 결혼이 주는 포근한 안정감이 어색하다가도 이내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아직 아이가 없다. 그렇다고 딩크족은 아니다. 그냥 아직 계획이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린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친구처럼. 연인처럼.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사회생활로 올라간 입꼬리를 내린다. 굳어있던 표정을 벗어낸다. 대신  입이 삐죽 나온 채 '뭐', '됐고', '근데' 라며 남편과 편한 전화 통화를 주고받는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고, 남편 얼굴 보며 웃고 싶다. 하루 피로가 모두 풀리게.

집으로 향하는 길이 좋다.


남편에게 느끼는 설렘과는 또 다른 설렘.

재미있는 건, 아니 우리 남편이 알면 별로 재미없겠지만, 설렘은 다른 남자에게도 느낀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느끼는 설렘이 일상 속 소소한 재미와 기다림, 함박웃음 짓게 하는 설렘이라면 타인에게 느끼는 설렘은 불쑥 예고 없이 찾아오는, 짜릿하고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쫄깃한 느낌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다가도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설렘이다. 영악한 감정이다.



타인에게 느끼는 설렘은 불쑥 예고 없이 찾아오는, 짜릿하고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쫄깃한 느낌에 가슴이 벌렁거리는,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다가도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설렘이다.



누구도 나에게 결혼하고 이런 감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이건 뭘까. 처음엔 무척 당혹스러웠다. 무슨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괜히 남편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결혼하기 전 '아내가 결혼했다'는 영화 제목을 보며 '세상에 뭐 이런 영화가 있냐'라고 반문했던 적이 있다.

참 발칙한 상상력이다. 이건 단순히 유부녀가 바람을 핀 내용이 아니다. 진짜 그 유부녀가 또 결혼을 한 이야기다.(제목이 아내가 결혼했다잖아!) 

두 번째 남편과 합의하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니 아니,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결혼 생활을 유지한 채 두 번째 그냥 결혼을 또 하는 것이다. 두 번의 결혼식, 두 명의 남편, 동시에 하는 두 개의 결혼생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과감한 설정이다.

나도 모르게 남자 주인공(그 못된 가시나의 첫 번째 남편!)에게 동화되어 열불이 난다.

이 불여우가 진짜! 이놈은 왜 당하고만 있어 바보같이!


결혼제도는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은 인간이 만든 제도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저 쿨한 여자의 발상이 괴상한 것만도 아니다. 얼마 전 일로 만났던 이슬람 남자가 나에게 말해준 바로는 자기네 나라는 남자의 경우 네 번까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자기 형은 그래서 와이프가 둘이라나. 그럼 너도 결혼 많이 할 거니? 아니, 난 지금 와이프만 사랑할 거야. 오 로맨틱 가이. 짝짝짝.(근데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것은 코란에 따른 것이다.


전쟁고아들을 공정히 대해 줄 수 없을 때는 아내를 구하라. 둘, 셋, 넷까지. 그러나 아내들을 공정하게 대해 줄 자신이 없거든 한 아내로서 족하리라. (코란 4장 3절)
이슬람에서는 네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코란에 명시되기 전에는 아무런 제약 없이 여러 여자를 취했고, 또 버렸다. 부인을 겨우 네 명까지로 제한한 것은 7세기의 상황으로 봐서는 혁명적인 일이라고 한다. 그 발단은 코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으로 인한 과부와 고아를 돌보기 위한 일종의 복지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中>


우리나라는 일부일처제다. 한 남자, 한 여자랑 평생을 살란 법도 없지만 동시에 여러 남자, 여러 여자랑 살란 법도 없다. 하지만 법이 그래서, 도덕이 어째서 못할까. 머리가 좀 좋지 않고서야 힘들어서도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한 여자와, 한 남자와 평생을 살고 있다. 평범할지 몰라도 내 경험상 결코 자연스럽지는 않은 한 여자와, 한 남자와 평생... 


우리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설레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결혼이란 제도는 근대에 와서야 정착된 불과 몇십 년된 제도일 뿐이지만,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몇만 년을 내려온 우리의 본능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 영악한 설렘에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니다. 감정만큼은 자유로운 것이니까.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적응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젠틀한 남자를 알게 되면 설레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죄책감은 버리되 그냥, '아깝네 쯧쯧...' 하고 돌아선다. 퇴근길 남편을 볼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다가도 저녁 상 앞에서 남편 말 한마디에 씩씩거리며 싸운다. 속 좁은 인간, 그래 너 잘났다 하다가도 금세 넷플릭스를 보며 담요 하나 둘이 두르고 꼭 껴안는다.


결혼은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상대만을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분명 있다. 다만, 나는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다시 사랑할지언정 남편 하고만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라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을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우리는 평생 그를 사랑하겠다는 맹세보다 평생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함께하겠다는 약속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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