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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처음 맞은 혼자 보낸 시간

잔소리 청정구역에서 같잖은 짓을 하기 딱 좋은 시간

by 신세라

"엄마가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신다네? 이번 주말에 집에 좀 다녀오자."

"응, 다녀와."

"너는 안가?"

"페인트 칠하는데 나 방해만 되지, 어머니도 불편하셔. 그냥 오빠 혼자 다녀와."


시댁 집을 보수할 일이 있어 남편이 본가에 다녀와야 했다. 공구를 들고 집을 보수하는 일이라 남편 도움이 필요했다. 나도 따라갈 수는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 천사 같은 분이시다. 이 시대가 바라는 시어머니상이라고나 할까. 한 번도 나를 함부로 대하시지 않으셨다. 늘 예의를 지키시고, 내가 시댁에 오는 것은 당신 아들처럼 쉬러 오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이번 길에 동행을 한다면 아마 나를 집에 혼자 두실 거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은 열심히 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가기 싫었다. 감사하지만 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어머니께서 나 신경 쓰신다고 이래저래 힘든 몸으로 밥까지 차리신다 하실까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 쿨하게 예의 따지지 말고 실용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오빠가 한 번씩은 혼자 내려도 가야지 어머니가 며느리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아들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러지, 안 그래?"


억지로 만든 명분은 덤이었다.


그렇게 얻은 나 혼자만의 주말이었다.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터라 혼자 집에서 며칠 지내는 게 좀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시댁에 가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친정집에 가서 있기도 싫었다. 그때는 나에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기만 했다. 생각해보니 결혼한 이후 나는 혼자 지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퇴근 후 저녁은 남편과 티브이를 보면서 하루 종일 고팠던 스킨십을 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회사 안 가는 주말은 남편과 뭐라도 하며 주중 동안 고팠던 스킨십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육체적인 스킨십과 정신적인 스킨십 모두. 적어도 결혼 전에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잠깐 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책을 읽든 외국어 공부를 하든 일기를 쓰든 그렇게 내 공간과 내 시간이 넉넉히 있었다.

뭐해? 재미있어? 그러다 엄마는 적적하면 내 방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빼고 말하곤 했다. 지금 남편은 내가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벌써 묻는다.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 이번 주말에 뭐할까.


신혼인지 아닌지를 한 가지 기준으로 가름하기는 어렵겠지만 나에게 신혼은 같이 있느라 정신이 없어 내 시간에 대한 갈망이 채 생기지 않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야근으로 힘들고 회사 사람들과 재미없는 회식을 하느라 힘들어도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 빨리 집에 가서 '우리 자기' 보고 싶은 생각이 더 드는 것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신혼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주말이었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우선 밥이 문제였는데, 요리에 소질도 없고 게으른 내가 혼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찍을 수는 없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을 모자로 대충 가리고 토요일, 일요일 아침에 먹을 크로와상을 집 앞 빵집에서 하나씩 두 개를 사고, 그 옆 가게에서 점심으로 대충 때울 김밥도 두 줄 샀다. 한 손에는 빵, 한 손에는 김밥을 들고 레깅스 바람으로 주말 아침 동네를 횡보하는 기분이란. 바게트 옆에 끼고 센 강을 걷는 파리지앵이라도 된 양 심플하고 무심한 듯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의식하며 사뿐사뿐 걸어 집으로 왔다. 주말 아침 주변 사람은 그리 없었는데도.


작정하고 만든 내 시간, 나는 고상하게 크루아상을 한 입 물며 책이라도 읽어야 했을까. 나는 빵과 커피를 작은 쟁반에 올리고는 책상 대신 티브이 앞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하루 종일 넷플릭스를 봤다. 결혼하고 책 읽을 시간 없다며 볼멘소리 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나는 혼자 넷플릭스를 몇 시간이고 보고 싶었다. 남편이 있으면 늘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넷플릭스 폐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2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남편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던지고 간다. 내가 뭐랬어 넷플릭스 시작하지 말라고 그랬지. 한 번 시작한 드라마는 끝을 봐야 하는 내 성미에 남편이 자극한 죄책감이 더해져 머리만 뜯다, 마지못해 끄고 만다.


우리 몸은 머리를 열심히 쓴 만큼 반대급부로 모든 긴장을 풀고 머리를 쉬게 만든다. 이것은 삶의 리듬이다.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자기만의 쉼의 방식으로 일종의 일탈을 벌이며 그 속에서 균형을 잡고 산다. 하지만 이 균형이 깨지는 게 바로 결혼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갈등이 생긴다. 내가 넷플릭스를 볼 때 남편이 걱정하고, 남편이 게임을 할 때 내가 걱정하듯이 결혼 전 혼자일 때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던 내 생활 습관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그날 나 혼자만의 시간은 '자유 시간'이라기보다는 '해방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놈의 잔소리, 걱정으로부터의 해방. 주말 내내 시즌1에 있는 16편의 드라마를 다 보는 동안 작품 속 긴박함과 긴장, 갈등 해소와 감정의 전율이 내 몸에 삐죽 선 털 하나하나에 옮겨졌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이었다. 내가 작정하고 넷플렉스 폐인 생활을 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다니, 이게 실화냐. 웃기게 들리지 몰라도 난 드라마를 보는 동안 머릿속 상념을 정리할 수 있었고, 드라마 줄거리는 내 상념에 양념이 되어 나만의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일지는 몰라도 나만의 갈증 해소, 감정 쓰레기 배출구였다. 만약 남편이 있었다면 드라마를 보면서 눈치 보랴 죄책감 느끼랴 상쾌하기는커녕 주말을 날렸네 하며 허공에 대고 한숨만 쉬었을 것이다. 같은 드라마를 봤는대도. 얼마나 억울한가.


결혼 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무슨 대단한 것을 하거나, 내 안의 소리를 듣겠다는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같잖은 짓거리'를 상대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하기 위해 더 필요하다. 우리는 결혼을 하면 상대의 눈치를 정말 많이 본다. 술 먹지 마라, 게임하지 마라, 주말에 낮잠 자지 마라, 유튜브 많이 보지 마라 등등. 상대에게 잔소리를 하기도 하고, 상대 눈치를 보기도 하며, 동시에 상대 몰래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부부 관계 건강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각자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도록 둬야 하지 않을까. 한밤 중에 나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가 게임을 하곤 했던 남편에게 당당하게 저녁에 하라고 일러줬다.(한밤 중 헤드셋 껴고 내가 뒤에 있는지도 모른 채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는 남편을 본 심경을 아는가. 배신감보다 절망감이 느껴진다.)


아빠는 퇴근 후 늘 막걸리를 한 병 사 가지고 오셨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티브이를 작게 틀고는 마른 멸치 한 줌을 안주 삼아 혼자 술을 마시곤 하셨다. 아빠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가 늘 잔소리를 했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를 피해 혹여나 깨울까 눈치를 살피며 늦은 밤을 보내셨다. 난 피곤해 보이는 아빠가 저 시간에 왜 주무시지 않을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간 깨어있는 것이 아빠에게는 피로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나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만의 '같잖은 짓'을 즐겼을 아빠가 이해된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단, 지나친 음주는 자신의 건강과 가정생활을 해칠 수 있다는 경고는 잘 새겨두길. 넷플릭스도 게임도 뭐든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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