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두려워 말고 사랑하자는 약속, 쉽지 않지만 지키고 싶은 약속
변하려 하지 마세요,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말이에요.
당신은 지금까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상상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에게 너무 익숙해져 당신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요.
난 지금까지 좋은 시간을 보냈고, 어려운 시절이 와도 받아들일 거예요.
지금 그대로 당신을 받아들일게요.
- Billy Joel <Just the way you are> 가사 중
이 곡은 싱어송라이터인 빌리 조엘(Billy Joel)이 1977년 작사, 작곡한 곡으로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를 위해 만든 곡이다. 빌리 조엘은 노래 속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새로운 유행을 따르려 하지 말고, 머리 색도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속삭인다. 그보다 자신과 늘 통하는 정열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빌리 조엘은 이 노래에서 그저 당신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지금 당신 그대로가 좋으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아요"라고.
"뭐어?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
남편과 결혼 전 연애를 하던 시절, 딱 한 번 싸운 적이 있는데 그건 서로 다른 정치 성향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은 정치 성향이 좀 달랐다. 한쪽은 다소 보수적이었고, 다른 한쪽은 다소 진보적이었다. (서로 자신이 합리적 중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날 사건의 발단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틀어놓은 티브이 속 뉴스였다. 솔직히 지금은 그 뉴스가 뭐였는지, 그래서 서로 생각이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토론이 되었고, 논쟁이 되는가 싶더니, 언쟁이 되고 감정이 상하고 말았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난다. 남편이 결연하게 입을 꼭 다물고 나를 보던 그 표정도.
또 하나 똑똑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이 12월 31일이었다는 것이다. 사귀기로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처음 맞이하는 연말이었다. 기념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 만난 건데 뉴스 하나로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우리 관계에 중요한 문제도 아닌 걸로 말이다. 함께한 해를 추억하고 다가올 해에 더 사랑하자고 서로 고른 카드에 예쁜 말을 써주며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애써 고른 와인과 케이크만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애매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미 난 먹고 있던 밥맛도, 먹으려고 했던 술맛도, 사랑할 기념일맛도 모두 떨어져 버린 뒤였다. 벌떡 일어나 집에 가자니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달랑 '뉴스 하나' 때문인 건데, 이러면 훗날 '쓸데없이 꼿꼿했던' 내 모습이 쪽팔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와인 잔을 기울이자니 어떻게 해도 웃는 표정,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눈만 끔벅끔벅 거리며 머릿속으로 대답 없는 질문만 해대고 있었다. 정치 성향 안 맞는 사람이랑 계속 가는 게 맞는 거야? 왜 전에는 이 사람의 성향을 몰랐지? 안 그래도 아빠랑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안 맞아서 짜증 나는데 이 사람하고 결혼해서도 계속 정치로 싸워야 해? 그렇다고 헤어져? 고작 이런 이유로? 아니지, 이건 '고작'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때 남편이, 그러니까 그 당시로는 남자 친구가 노래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 노래가 바로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였다. 잔잔한 반주에 꾸밈없는 음색으로 담담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선율은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내 허리를 감싸고 한껏 올라가 있던 내 눈꼬리를 따뜻한 공기로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듣는 기분 좋은 팝송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나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각 소절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Just the way you are. 지금 당신 그대로.
I'll take you just the way you are..
I want you just the way you are..
I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노래 가사처럼 그냥 너의 모습 그대로가 난 좋아. 내가 너를 좋아했던 건 이렇게 자기 생각이 있고 그것을 이야기할 줄 아는 네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니까."
지금 그날의 로맨스를 기록하려니 마냥 오글거린다. 남편도 아마 이 글을 보면 큭큭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글거려도 기억하고 싶다. 그때 내 남편은 진짜 멋있었다.
내가 도망가려 하고 피하려고만 할 때 내 남편은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반대로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상대로부터 도망칠 생각만 하곤 했다. 나랑 맞지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면 함께 하기 어렵겠다며 연인과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곤 서둘러 실망을 해버렸다. 상대방이 나에게 실망할까 두려워 먼저 실망을 해버리고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점점 사람을 만나는 것에 보수적으로 되어갔고, 마음껏 사랑을 나눠볼 기회를 갖기 어려웠다. 상처 받기 싫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이 들려준 노래와 속삭이던 말은 어렴풋이 사랑을 깨치게 해 주었다. 남편은 <Just the way you are> 속 가사말처럼, "변하려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와 같이 사랑을 나눠요"라며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짓 상처 받으면 어때, 나는 그냥 네가 좋은걸. 까짓 서로 생각이 다르고 맞지 않으면 어때, 나는 그냥 그런 네가 좋은걸. 그래서일까. 남편은 많은 사랑을 했었고(짝사랑을 포함해서), 그만큼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짝사랑을 하면 늘 고백을 했으니), 또 그만큼 자유롭게 자기감정대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부럽게도.
결혼을 하고 이제 그때 남자 친구는 남편이 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사랑을 알려주었고 함께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게 잘 되지는 않는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쉽게 될 리 없었다. 쉬웠다면 빌리 조엘이 굳이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남편과 싸우고 나면 도망가려고만 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붙잡아주는 남편이 혹시나 나를 놓아버릴까 두려워한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마음껏 사랑할 줄 아는 행운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 같다. 대신 그런 행운을 가진 남자를 선물로 받은 것 같다.
빌리 조엘과 엘리자베스 웨버는 끝내 이혼한다. 이후 빌리 조엘은 한동안 <Just the way you are>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당신 그대로 사랑한다'는 건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지키고 싶은 약속이다. 내가 이 노래에 더 애착이 가는 이유다.
오랜만에 <Just the way you are>를 듣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