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 먹을 김장 김치에 담은 어머니 마음
"엄마, 나 이번 주말에 시댁에 내려가."
"왜?"
"어머니가 김장 김치 우리 꺼도 해 놓으셨거든."
"그냥 택배로 받지, 뭘 힘들게 내려가니?"
"어떻게 그래. 어머니 힘드시게."
내가 엄마보다 철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한 걸까. 아니면 딸 생각에 엄마는 저런 말을 한 걸까. 친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남편이 김치를 받으러 주말에 시댁에 내려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어머니 힘드실 걱정만 하는 착한 며느리가 아니었다. 또 엄마는 택배로 받으라고 말은 하지만 어머니의 수고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나는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시댁까지 가는 길, 주말에 고속도로 위에서 버릴 왕복 열두세 시간에 짜증이 나있었고, 엄마는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내려가는 길에 시어머니께 드리라고 몇 가지 챙겨주시는 일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러자 하면 그러라 하실 어머니
당일로 다녀올 수 없는 나의 시댁은 최소 1박 2일이다. 시부모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잠을 자는 것은 아직도 민망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지는 멀고도 고된 길이기도 하다. 시댁까지는 서울에서 차로 막힘없이 달려도 5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거리다. 왕복으로 치면 10시간을 훌쩍 넘는다. 이제는 휴게소 음식이 지겨워 내려가기 전날 김밥을 사놓고 휴게소는 가볍게 거른다. 과속 카메라를 피해 속도를 바짝 올려 달리는 노련함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거리는 5시간에서 더 이상 줄지 않는다. 이쯤 되니 사 먹으면 그만인 김치를 받겠다고 그 먼 시댁에 꼭 가야 하냐는 의문은 더 이상 내 주변의 엄마, 직장 동료만이 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머릿속으로 혼자 계속 되묻고 있었다.
'굳이 가야 하나, 잘 먹지도 않는 김치 꼭 가져와야 하나, 이번 주말에 다녀오면 다음 주 출근길 힘들어서 어째.'
하지만 나는 차마 어머니께 택배로 김치를 받겠다고 하지 못 한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러자 하면 그러라 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차마 그 말만은 못 하겠다.
어머니 말로는 올해 김장 김치는 망해버렸다고 한다. 건강에 좋은 것을 생각한다고 '액젓' 대신 남해산 '생젓'을 넣었더니 김치가 엄청 짜기만 하다고 말이다. 짠 거 싫어하는 며느리 걱정에 기가 팍 죽어 전화 통화 목소리가 좋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래서일까. 지난 주말 내가 내려가자마자 어머니께 김장하시느라 힘드시지 않으셨냐 안부를 물어도 뭐가 불편하신지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신다. 내 눈을 피하시며 그저 큰 목소리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만 하신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전화로 기죽어 한 소리를 나에게도 하신다. 기죽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듯 '액젓'과 '생젓'이 어쩌고 저쩌고. 그래도 내 눈을 여전히 마주치지 못하신 채.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잘못하신 거 없어요, 라는 말이 목까지 찼다가 도로 내렸다. 이런 우리 어머니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 김장 김치, 택배로는 못 받겠다. 그래, 내려가길 잘했다.
어머니는 우리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신다
남편은 스무 살,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햇수로는 벌써 20년이 갓 넘었다. 인생의 반을 부모와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남편은 서울에 올라온 첫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날은 너무 추웠고, 너무 외로웠다고 한다. 어머니와 둘이 몇 가지 짐을 머리에 이고 서울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어머니는 학교 기숙사에 짐을 내려놓으시고 바로 내려가셨다. 남편은 저녁이 되자 배가 고파왔고 혼자 밥을 사 먹으러 차가운 서울 거리를 나섰다. 지금은 '혼밥'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20년 전 한국은 '혼밥'이라는 단어도 없을 시절이었다. 식당에 혼자 들어서자 느껴지는 여러 시선을 뚫고 맨 구석자리를 찾아 앉아 순대국밥을 먹었다. 어머니가 못 먹게 하던 순대국밥. 남편은 그때 먹은 순대국밥은 처음 맛보는 '자유의 맛'이었다고 회상한다. 지금도 남편은 순대국밥을 제일 좋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유의 맛'은 여유 있게 즐길 수가 없었다. 혼자 뻘쭘하게 식사를 하려니 빨리 먹고 나갈 심산으로 머리를 콱 처박고 허겁지겁 먹은 것이다. 국밥이 뜨거워 땀을 옴팡 쏟으면서.
땀범벅이 된 채 식당에서 나왔다. 서울 찬바람은 더욱 찼다. 그리고 그날 밤 감기몸살에 체기까지 있어 밤새 끙끙 앓고 만다. 남편에게 서울의 첫인상은 차고 춥고 서늘한 외로움이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편으로 그날을 회상하는 어머니의 또 다른 이야기는 어떨까 혼자 생각해봤다. 아마 아들이 열이 나고 끙끙 앓았던 밤, 어머니도 잠 못 주무시고 끙끙 앓으셨겠지. 당신에게는 어리기만 한 아들을 생전 처음 타지에 두고 혼자 집으로 내려오는 길은 가볍지만는 않으셨겠지. 지금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날의 어머니의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확실히 뭔가에 홀려 계신다. 이것도 가져가라, 저것도 넣어라, 정신없이 부엌과 발코니, 냉장고와 냉동고를 헤맨다. 손에 잡히는 게 뭔지도 모른 채 넣으라 하고, 더 이상 들어갈 데 없다며 투정하는 아들의 짜증에는 귀를 닫아 버리는 어머니. 그 실랑이를 보고 있자면 난 아무런 한 것도 없이 지쳐버린다. 넣고 빼고 넣고 빼다 힘까지 다 빼고 간신히 짐을 챙겨 문을 나선다. 어머니는 따라올 수 있는 곳까지 따라와 우리를 배웅하신다.
"하아, 정말 왜 저러시지? 뒤에 봐봐"
남편은 안타깝고 아린 마음을 한숨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백미러로 보이는 어머니 모습을 가리킨다. 뒤를 돌아보면 어머니는 아직도 거기 서 계신다.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그리움과 외로움이 차츰 숙명으로 다가오자 어머니의 이야기가 들렸다
결혼을 하고 평생 함께 할 남편이라는 존재가 생겼지만 평생 함께 한 부모님과는 떨어졌다. 부모님 없이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결혼이 가져다준 내 삶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졌다. 결혼 후 첫 몇 달간 느낀 신혼의 달콤한 재미는 알콩달콩한 설렘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자유가 주는 상쾌함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내 세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먹고 싶은 대로, 놀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쓸데없는 잔소리와 걱정을 듣지 않아도 된다니 그야말로 해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달.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고 마음도 안정을 찾자 마음 한편에 미처 알지 못했던 깊숙한 외로움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꿈에 부모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분은 차례차례 내 꿈에 나오더니 여지없이 두 분 모두 나를 떠나고 나는 허공에서 두 분을 부르다 잠에서 깨곤 했다. 너무 실감 나게 느껴져 무섭기까지 한 밤이었다. 자꾸 그런 꿈을 꾸다 보니, 두 분이 늙은 모습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었고 그러더니 습관적으로 부모님을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마음까지 들었다.
이때 문득 이상하게도 엄마보다는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들이 보고픈 이런 밤을 십 수년 지냈을 어머니 말이다.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 이것 저것 챙겨만 주시다 뒤늦게 아들 손 한 번 잡지 못한 걸 깨닫고는 우리 뒷모습을 보며 두 손을 꼭 모으시는 어머니.
그 밤, 나는 부모님과 평생 못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몸을 떨었고, 그제야 어머니가 여리셔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그리움과 외로움이 차츰 숙명으로 다가오자 자연스레 두 손이 모아졌다. '그 밤'을 이제 나도 알아버렸기에 '나와 내 부모'처럼 '남편과 남편 부모'가 내 이야기로 들린다.
늘 함께하고픈 바람이었다
시댁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은 늘 두 손이 무겁다. 양손에 든 어머니표 먹거리는 무겁기만 한 게 아니라 무척 실하기까지 하다. '손수' 까서 쪄낸 흑마늘, '손수' 몸에 좋은 잡곡과 콩을 찌고 방앗간에 이고 가서 빻아낸 선식, '손수' 캔 쑥과 좋은 맵쌀로 먹기 좋게 한 덩어리씩 잘라 놓은 쑥떡, '손수' 현미를 떡집에서 길게 뽑은 가래떡, '손수' 만든 메밀묵. 손수, 손수, 손수 이것들을 준비하시면서 어머니는 우리가 먹을 아침, 점심, 저녁을 그리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 몸 힘든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을 참 많이 사랑하신다. 그 덕에 나도 그 사랑에 묻어가고 있다.
손수 하는 음식 중 단연 고됨의 으뜸은 김장 김치이다. 1년을 먹는 식량 준비는 그 시간만큼이나 품이 더 많이 드는 과정이다. 이제는 우리 엄마도 힘들다며 포기한 김장 김치를 어머니는 아직도 손수 배추를 절이고 하나하나 담아, 아들네와 딸네 먹을 것을 모두 해내신다.
이제는 하지 마시라 해도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이건 바로 먹고, 이건 더 익혀 먹어라' 김치 덩어리를 구분 지어 주실 뿐이다. 앞으로 1년 동안 아들과 함께 있을 김치들이 잘 지내기를 바라듯이 말이다. 자식에게 한아름 김장 김치를 안겨주며 잘 가라 툭툭 자꾸만 매만지신다.
어쩌면 어머니께 김장 김치는 단순히 1년을 나기 위한 식량 준비가 아닌 듯 보인다. 자식과 떨어져 보낼 세월, 늘 함께하고픈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그 바람, 소중히 차 트렁크에 담아 다시 5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어머니, 잘 먹을게요. 늘 고마워요. 속으로 되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