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他의 감각
"등에 로션 좀 발라줘"
낮은 음성으로 bn에게 빠르게 말했다
며칠 전부터 건조한 건지 따끔거리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등이 특히 그랬고 안쪽 허벅지와 뒷 목덜미, 윗 팔의 바깥쪽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손이 충분히 닿지 못하는 곳. 미세하게 오염된 직물이 압박하는 곳. 피부가 눌려 공기가 통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곳. 그런 곳에 서식하는 진드기와 벌레들. 기계나 도구의 힘 또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곳. 타인의 손이 필요한 지금 bn과 늦은 저녁 불멍을 끝내고 막 들어온 텐트에 앉자마자 건넨 말이었다. 캠핑하는 밤이 많았었다.
던져진 부탁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의 생각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태어나 존재가 되는 무의식적인 생각들과 그 생각에 생각에 생각에 생각들
마음속으로 짧은 생각을 하다가, 자루 길이 30센티미터, 호 길이 9센티미터인 사군자 붓에 시커먼 먹물을 푸욱 찍어 한지에 글자를 천천히 써내 린다. 난초나 꽃, 나무나 바위, 나비 따위를 주로 그리는 동양화 붓이라지만 사군자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한다. 붓대와 호의 긴 길이가 한지의 표면과 쓰는 이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적당히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 붓의 장점이다. 붓의 가장 꼭대기를 잡고 글을 쓰기에 그 사이는 가깝고도 멀다. 흔들림과 붙들림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동반된다. 집중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붓을 든 오른손이 붓을 잡고 힘을 뺀 상태로 부드럽게 왔다가 갔다가 반복되는 동작으로 쓰는 것이 때때로 불완전하고 연속적이므로 멈추기가 쉽지 않다. 아침에 시작된 붓글씨 쓰기 퍼레이드. 오후 내내 종이 먼지를 날리는 한지는 먹물과 글자들의 방문을 끊임없이 반긴다.
글자들이 한지를 빼곡히 채우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것이 빼기의 의식이자 습관이 된다는 거다. 마음의 상태가 비워지고 새로워진다. 몸짓과 손놀림의 축적이 배설이 된다. 상쾌하다. 어떤 운동을 할 때 심신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붓도 고요하게 출발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도움닫기 후 도약하고 요동친다. 하이라이트를 달리다가 서서히 가라앉고 숨을 고르면서 오르락내리락 다이내믹한 구간들을 통과해 낸다.
캠핑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된 붓글씨 마라톤이 겨울 아침부터 오후를 달린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