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진로라는 말은 늘 열여덟 살 무렵에 멈춰 있는 것 같다. 교실 안, 칠판에 큼지막하게 쓰인 ‘장래희망’이라는 단어, 그리고 선생님이 묻던 질문들. “너희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때 나는 대답조차 망설였다. 간호사, 교사, 화가, 기자, 아무거나 말해도 되는 나이였지만, 이상하게 움츠러들었다. 내가 상상하는 멋지고 화려한 모습은 내 부모님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그저 상상놀이처럼 느껴졌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절대 내가 이룰 수 없는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본 주변의 직업들에서 미래를 찾았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노력하면 바위도 뚫을 수 있는데 왜 그리 소극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내 미래를 찾을 노력을 하지 않은 탓에 그저 지금을 버티는 직업을 선택했고, 종종 일하는 게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여태껏 진로라는 단어 앞에 할 말을 잃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진로를 묻고 있다니, 이게 우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많은 순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다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이라고. 그는 한때 철저히 계획적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되는대로 살아간다고 했다. 다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흘러가도 매일매일은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 말이 내게 깊이 와닿았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하고 싶은 일과되고 싶은 나를 글로 적어둔다. 그런데 불과 1년 전의 계획들이 금세 무너져버리곤 한다. 대신 전혀 예상치 못한 계획이 생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깨닫는다. 인생은 원래 내가 그려놓은 대본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제는 남편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일하느라 시간도 없는 사람이, 왜 그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드느라 애쓰는 거야? 그게 돈이라도 돼?” 나는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갈 길이 보일 거라고 믿어.”
솔직히 말하면, 내 미래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을 살피며 하고 싶은 것을 경험하고 성찰한다. 어떤 순간에 행복하고, 어떤 순간에 불행한지 기록해 둔다. 그 흔적들을 모아두면, 언젠가 내가 서야 할 자리가 보일 거라 믿는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지금 하는 사업의 확장이나 심화가 내 미래는 아니라는 것. 사업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지만, 동시에 나를 소진시키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나는 글쓰기로 도피했다. 글을 쓸 때는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숨 쉰다는 느낌이 그저 쉼인지 업을 향한 시그널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는 쓰는 행위를 통해 먹고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고 길의 귀퉁이 쪽으로 비틀비틀 걷더라도 그 길을 걸어야 행복할 거라는 걸. 그래서 무작정 읽고, 무작정 쓰고, 기록을 남긴다. 언젠가 내 길이 또렷이 보일 때까지.
진로. 나아갈 ‘진(進)’, 길 ‘로(路)’.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은 지금 내가 걷는 길의 연장선일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언젠가 내 진로가 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늦게 찾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살아보니, 평생 그 길을 찾지 못한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늦게라도 찾으려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진로를 고민하는 10대 조카들에게 말해준다. “네가 본 세상 안에서만 직업을 고르려 하지 마. 유망한 직업들도 기웃거리지 말고. 그 시간에 너 자신을 잘 들여다봐. 뭘 할 때 행복하고, 뭘 할 때 불행한지 일기를 써봐. 그 기록을 들여다보면 네가 보여. 진짜 너를 먼저 찾아야 해. 그래야 진짜 너로서 세상을 보게 되고, 그래야 행복하게 살아갈 길이 보일 거야.” 사실 그 말은 조카에게 하는 동시에 나에게도 건네는 말이다.
진로란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건, 어쩌면 내가 그 단어를 너무 오랫동안 남의 기준에 맞춰 정의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돈 된다는 거, 수요가 많다는 거, 전망이 좋아서 오래 돈을 벌며 살 수 있다는 거. 남들이 말하는 안정된 길, 보장된 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길, 내가 웃으며 걸어갈 수 있는 길. 그것이 나의 진로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비틀거리고 돌아서기도 하고, 계획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나의 길을 만들었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긴다. 그 행위 자체가 나를 살리고, 언젠가는 진로가 되어줄 것이기에.
이 글은 브런치북에 연재하고 있는 이손끝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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