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시험 탈락, 갈갈이 극단 입단까지 포기하다

9화

by 이손끝

25살. 대학에 계속 떨어지고 나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어느 순간부터 우울증이 찾아왔고, 사람 만나는 일이 버거워졌다. 꼭 필요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연락도 피했다. 나에 대해 묻는 질문이 싫었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괴로웠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 속에서, 나는 이유 없이 웃고 싶어졌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잠시라도 나를 잊고 싶었다. 그렇게 흘러간 곳이 상암동의 KBS방송예술원, 개그연기과였다.


거기서 나는 KBS 코미디언 시험을 준비했다. 첫 수업에서 만난 친구 중 유난히 첫인상이 재밌고 편한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짝이 되어 개그를 짰다. 구조는 늘 비슷했다. 나는 보조 역할, 그 친구가 웃음을 견인하는 역할. 대본은 내가 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대본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타이밍도 어색했고, 웃음 포인트도 엉성했다. 희극은 계산이 필요한 장르였는데, 나는 그 계산에 서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수업에서 나는 정극 연기를 더 잘했다. 감정을 쌓아 올리고, 인물의 서사를 이해하는 건 비교적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웃겨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어색해졌다. 웃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몸은 굳었고, 머리는 하얘졌다. ‘나는 역시 개그 쪽은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학로에 공연을 올렸다. 내가 기획한 작품이 두 개나 무대에 올랐다. 콘셉트와 구성은 나쁘지 않았고, 동선도 깔끔했다. 사람들은 “기획은 좋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 뒤에는 늘 같은 뉘앙스가 따라왔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안 웃기다.’ 객석에서 터져야 할 웃음 대신 어색한 박수가 흘렀다. 나는 점점 위축됐다. 나 때문에 무대가 재미없어지는 것 같았고, 함께 무대에 서는 친구들에게 누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웃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웃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준비했다. KBS 코미디언 시험. 서류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직 끝난 건 아니구나.’ 하지만 실기 날, 그 희망은 너무 빠르게 꺼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심사위원들이 2줄로 앉아계셨다. 얼굴을 아는 개그맨들도 섞여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연기했다. 시작하자마자 들린 말은 “잘 봤습니다.” 준비한 걸 다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웃긴 내 친구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나가라는 신호였다. 그 순간 아, 떨어졌구나.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광탈이었다. 나 때문에 친구에게 피해를 입혔단 사실에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늘 그랬다. 가슴이 뛰는 순간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동시에 작은 가슴은 견디질 못해 모든 걸 망쳤다. 소심한 나는 무대에 서면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손이 떨렸고, 머리는 새하얘졌다. 연습 때 잘되던 것들도 실전에서는 엉망이 됐다. 그때마다 나를 괴롭힌 건 실패 그 자체보다 죄책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팀의 무대가 흔들린 것 같았고, 함께 준비한 친구들의 시간을 망친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개그우먼 시험에 떨어지고 난 뒤, KBS방송연예과 친구들 모두에게 제안이 왔다. 대학로 갈갈이 극단 입단 제안이었다. 당장 소극장 무대에 설 수 있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다. 누군가는 설레했고, 누군가는 망설였다. 나는 그 결정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리고 결국, 돌아섰다. 그 무대가 두려웠다. 또다시 떨다가, 또다시 모두의 시간을 망칠까 봐. 더 이상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꽤 큰 기회였던 것 같다. 무대는 계속 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 부름을 외면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 선택을 후회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때의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이미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나보다, 무대 아래에서 숨 고르는 내가 더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모든 실패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무대를 사랑했다. 비록 떨고, 망치고, 도망쳤지만, 가슴이 뛰는 순간만큼은 진짜로 살아 있었다. 갈갈이 극단을 포기한 그날, 나는 또 하나의 무대를 내려왔다. 대신, 다른 무대를 찾기 시작했다. 떨지 않아도 되는 무대, 혼자여도 괜찮은 무대. 그렇게 나는 조금씩, 글이라는 무대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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