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6년간은 공부를 한 기억보다 편지를 쓴 기억이 많을 정도로 친구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글로 나눴다. 편지를 주고받는 대상은 학년마다 대여섯씩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쓴 편지는 장소의 생동감을 담은 발랄한 글이었고, 집에서 써온 편지는 조금 더 정성스럽지만 밤의 기운을 머금어간질간질한 이야기들이 지면을 채웠다.
오로지 편지를 예쁘게 쓰기 위해 문구점에 자주 방문했다. 연필 하나에 여러 색깔심이 박힌 색연필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문구점에 뛰어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을 정도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건너편 문구점으로, 초록불 신호등으로 바뀌자마자 내달리는 바람에 사고가 나서 한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진 것이다.
가늘고 작은 필체를 쓸 수 있고 고급스러운 색감이 다양한 하이테크 펜은 인기도 많고 비쌌다. 검은색 펜은 기본 소장용이고 하늘색과 핑크색도 잘 팔렸다. 어떤 친구들은용돈의 대부분을이걸 사는 데 투자했고, 그 펜만을 위한 필통을 따로 가지고 다녔다. 잃어버리는 경우도 잦아서 이름표나 스티커를 붙여두고 애지중지했다. 펜을 떨어뜨리면 가는 펜촉이 일그러져서 못쓰게 되는 경우가 생겨서 친구들 중에 펜촉 교체 전문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여고생의 취향에 맞는 예쁜 편지지는 구하기도 힘들고 값도 비쌌다. 그래서 편지지는 특별한 날에만 사용하고, 평소에는 의류 카탈로그나 잡지 여백에 빼곡하게 편지를 썼다. 연예인이 흑백 스케치로 그려진 편지지도 있었는데, 친구가 좋아하는 스타라면 주저하지 않고 골랐다. 누군가 좋은 것들은 다 사가고, 문구점에 남아 있는 편지지는 어딘가 촌스럽고 색도 바랜 채구깃한 포장 비닐에 싸여졸업할 때까지 제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소셜 네크워크라는 게 없던 시절에는 이렇게 편지로 잡다한 일상들을 나누고 우정을 확인했다. 졸린 수업 시간에 편지를 전달하는 일은 스릴 넘치는 장난이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접어서 옆 짝꿍을 툭 치면, 익숙한 듯 옆 분단 친구를 툭 치고, 그걸 보고 있던 뒷자리 친구가 슥 넘겨받아 배달지에 정확히 도착시킨다. 그럼 발신자와 수신자는 눈빛과 끄덕임을 교환하고, 잠시 뒤면 역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 하찮은 편지들이 얼마나 귀중했는지, 엄마 집에 가 보면 신발상자마다 모두 이런 편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글거림에 다시 꺼내 읽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절대로 버리지 못하게 하고 이사하기 전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편지에 그토록 진심이었으며, 보관된 편지에는 유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던 우리들의 울퉁불퉁 굴곡진 나날들이 고여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동안 멈췄던 편지쓰기는 딸아이가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다시 시작되었다. 딸기는 하얗고 오동통한 손으로 연필을 꼭 쥐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건넸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배달되는 러브레터는 나와 친구들의 편지 교환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날은 퇴근하자마자 딸기가 내미는 편지부터 맞닥뜨렸다.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담아 나도 답장을 써 주었다.
딸기는 주로 색종이에 편지를 썼다. 수첩도 많고 포스트잇도 노트도 많건만 꼭 구김이 한 구석도 없는 양면 색종이에 편지를 쓰고 싶어 했다. 그 색종이로 동서남북 종이접기를 만들어주며 방향을 선택을 하라기에 봤더니 각 방향마다 엄마를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고백의 말들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그 글을 읽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수십 번 선택을 해야 해서 오래 울고 오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 놀러 온 동료의 딸에게 받은 그림 편지도 몇 년째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있다. 편지 속에서 나는 8살 아이에게 언니가 되었고 그림으로는 핑크 공주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은 어쩜 이렇게 넓고 고운지 모르겠다. 딸기로부터 발송되는 편지는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 친구로 수신자가 바뀌었지만, 꼭꼭 접은 종이를 건네던 그때 그 모습들은 여전히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