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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un 12. 2022

아주 사소한 고백


6살 무렵이었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요, 본채와 별채, 마당이 있는 집이었어요. 4대의 피아노가 있던 별채 피아노방은 좁고 어둡고 답답했어요. 본채 안방에도 피아노가 한 대 있었죠. 피아노 소리도 제일 맑고 볕도 잘 들어오는 그 방은 항상 큰 언니들 차지였어요. 어쩌다 내가 앉게 된 날은 나도 훌쩍 언니가 된 것 같았고 괜히 으쓱해져서 자세도 바로 해 보게 되고, 피아노 연습도 괜히 더 잘 됐어요. 그 방 그 피아노 앞에 앉은 날 그 기분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선생님 그때 아기를 키우고 계셨어요. 그래서 본채 안방에는 늘 분유통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을 가르치러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분유통을 살그마니 열고 한 스푼 크게 떠서 입 속에 털어 넣으면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몰라요. 선생님이 언제 들어오실지 몰라 입가에 묻은 가루를 문지르면서, 가루가 넘어가 기침이 나오지 않도록 급하게 녹여 먹었어요. 그때 훔쳐먹던 분유의 한 달콤함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모범생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학교 숙제는 집에 불이 나도 챙겨야 하는 소중한 것이었죠. 방학 숙제 일기장은 그중에서도 두 달을 공들인 으뜸으로 중요한 숙제였는데, 그걸 글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꾸며 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던 그때, 어떤 날 뭘 했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몰라 도저히 다시 쓸 수 없는 절망이 작은 어린이를 엉엉 울게 했어요. 일기장 뒤편에는 잘라 쓰는 인형놀이가 그려져 있었거든요. 그걸 갖고 싶었던 사촌 언니가 제 일기장을 숨기고 일부러 주지 않았대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그 서러움과 원망의 눈물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남해바다 작은 섬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밤바다 파도 속에 손을 담그고 휘휘 저어보니 내 손 파르랗게 빛이 났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환상적인 형광색이었어요. 런 신비로운 빛이 내 몸에서 생겨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누구도 그런 경험이 없었대요. 그 기억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오래도록 알 수 없었는데, 얼마 전에 야광충이 많은 해변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에서 읽고 나서야 내가 지어낸 기억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오랜 의문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언젠가부터 당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저 멀리서부터 당신이  쪽으로 가까이 오면 주위가 환해지고 공간의 모든 것이 부유하면서 한 층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앉아서도 춤을 출 수 있었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기도 했어요. 부푼 마음은 어떤 모양으로든 부드럽게 바 수 있는 구름을 닮았요. 그러 당신이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전등이 깜빡거리고 공기가 탁해졌어요. 그 짧은 순간에도 삭막함을 느낄 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나의 당신, 글쓰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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