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달리 Jun 12. 2022

아주 사소한 고백


6살 무렵이었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요, 본채와 별채, 마당이 있는 집이었어요. 4대의 피아노가 있던 별채 피아노방은 좁고 어둡고 답답했어요. 본채 안방에도 피아노가 한 대 있었죠. 피아노 소리도 제일 맑고 볕도 잘 들어오는 그 방은 항상 큰 언니들 차지였어요. 어쩌다 내가 앉게 된 날은 나도 훌쩍 언니가 된 것 같았고 괜히 으쓱해져서 자세도 바로 해 보게 되고, 피아노 연습도 괜히 더 잘 됐어요. 그 방 그 피아노 앞에 앉은 날 그 기분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선생님 그때 아기를 키우고 계셨어요. 그래서 본채 안방에는 늘 분유통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을 가르치러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분유통을 살그마니 열고 한 스푼 크게 떠서 입 속에 털어 넣으면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몰라요. 선생님이 언제 들어오실지 몰라 입가에 묻은 가루를 문지르면서, 가루가 넘어가 기침이 나오지 않도록 급하게 녹여 먹었어요. 그때 훔쳐먹던 분유의 한 달콤함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모범생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학교 숙제는 집에 불이 나도 챙겨야 하는 소중한 것이었죠. 방학 숙제 일기장은 그중에서도 두 달을 공들인 으뜸으로 중요한 숙제였는데, 그걸 글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꾸며 쓴다는 걸 상상할 수 없던 그때, 어떤 날 뭘 했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몰라 도저히 다시 쓸 수 없는 절망이 작은 어린이를 엉엉 울게 했어요. 일기장 뒤편에는 잘라 쓰는 인형놀이가 그려져 있었거든요. 그걸 갖고 싶었던 사촌 언니가 제 일기장을 숨기고 일부러 주지 않았대요.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그 서러움과 원망의 눈물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남해바다 작은 섬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밤바다 파도 속에 손을 담그고 휘휘 저어보니 내 손 파르랗게 빛이 났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환상적인 형광색이었어요. 런 신비로운 빛이 내 몸에서 생겨나고 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 누구도 그런 경험이 없었대요. 그 기억이 실제인지 상상인지 오래도록 알 수 없었는데, 얼마 전에 야광충이 많은 해변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에서 읽고 나서야 내가 지어낸 기억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 오랜 의문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언젠가부터 당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저 멀리서부터 당신이  쪽으로 가까이 오면 주위가 환해지고 공간의 모든 것이 부유하면서 한 층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앉아서도 춤을 출 수 있었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기도 했어요. 부푼 마음은 어떤 모양으로든 부드럽게 바 수 있는 구름을 닮았요. 그러 당신이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전등이 깜빡거리고 공기가 탁해졌어요. 그 짧은 순간에도 삭막함을 느낄 만큼, 당신을 좋아해요.



나의 당신, 글쓰기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읽는 인간과 보는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