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세 명의 등장인물로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는 한껏 높이 쌓아 올린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다. 눈앞의 행복과 혀 끝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이 이내 손쓸 새 없이 줄줄 흐르는 허연 눈물로 변해버리고, 열심히 핥아 보아도 감당이 안될 만큼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마는 것처럼. 세 사람이 경험하는 사랑의 말로에는 처음 손에 쥘 때와는 다른 불쾌한 끈적임과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당신이라면 그 짧은 달콤함을 어디에 담을 것인가. 흘러내린 일부까지 받아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건네 함께 먹기에도 수월하지만, 다시 새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싶지는 않은 눅눅한 종이컵인가, 아니면 나눠 먹기 싫은 바삭함과 진한 초콜릿을 품고 있지만 요란한 부스러기를 남기고 실체 없이 사라질 콘인가.
혹은 늘 깨끗하게 씻어서 예쁘게 다시 담아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더 근사하고 깔끔하게 즐길 수 있는 크리스털 유리잔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하긴 유리잔이라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조각조각 깨진 위험한 파편에 찔려 피를 흘릴 수도 있으니까.
혀로 맛보는 아이스크림처럼 폴은 손으로 사랑을 감각한다. 손끝으로 사랑의 결을 느끼고 만진다. 스물다섯 살 요트 위에서 물살을 가르며 행복을 맛보았고, 로제의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완벽한 안정감’을, 그의 차 조수석에서 라디오를 켜면서는 손가락을 타고 기어오르는 권태를 경험한다. 때로는 몹시도 미워져서 포크로 로제의 손바닥을 찍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시몽의 손도 사랑의 메타포로 표현된다. 브람스의 음악을 감상하면서 폴은 시몽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만 결국 그와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시몽은 한 손을 상대에게 내어 주어 사랑을 움켜쥠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을 살아내고자 한다. 그 상황을 작가는 운전에 비유했다.
자신이 폴의 손에 한 손을 내어 주고 왼손만으로도 기적적으로 능숙하게 운전하는 동안, 폴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자신에게 기울이고 있는 상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익숙한 로제의 손이 다시 폴을 흔든다. 오랜만의 어색한 재회 자리를 박차고 나와 차에 오른 폴이었지만 당황해서 시동을 켜는 것을 잊었고, 그 버튼을 로제가 대신 눌러주었던 것이다. 각자 다른 사람과 춤추는 상황에서도 로제가 다른 이의 등에 얹었던 손을 뻗어 팔을 건드리자, 폴은 여전히 로제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 역시 손에 매력을 느끼는 편인데, 이 이야기에서는 어쩐지 시몽의 손을 잡고 싶다. 그의 사랑은 서툴러서, 농익지 않아서 나를 붙든다. 삶이든 사람이든,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서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발과 선고의 형식을 빌어 도발적이고 낭만적인 고백을 한 그에게 반했기 때문일까.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일상의 미세한 균열을 담아내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처럼, 사랑을 할 때면 상대의 한 마디 단어나 작은 몸짓에도 예리해지는 감각을 프랑수아즈 사강은 세밀하게 포착해서 드러내고 있다. 사랑이 가지는 충만한 행복과 권태와 어긋남의 순간을 알지 않느냐고, 당신의 그 순간들과 다르지 않으니 다시 들여다보라고 돋보기를 대준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면 오랜 연인인 로제가 폴을 방문할 때마다 ‘혼자 있어?’라고 묻는 습관에 대해. 예의 바른 그 말이 연인 사이에서는 한없이 서운하고 무례한 말이라는 것을 사강은 안다. 폴의 생활패턴이나 대인관계를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자 누가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로움을 굳이 일깨우는 말이기에 폴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의 ‘교활함’이 한없이 미운 것이다.
폴을 사랑하지만 혼자만의 시간과 얼마간의 자유를 필요로 하는 로제와, 행복에 충만하다가도 혼자 있게 되면 곧 공간과 마음마저 텅 비었다고 느끼는 폴. 로제는 폴이 외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모두 채워줄 수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치기 싫은 사람이고, 폴은 로제가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고 생각하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몹시 아슬아슬하다. 이들도 서로의 다름을 알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논리나 이성으로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인 것을.
사강은 왜 브람스를 골랐을까. 작품 해설대로 브람스의 연애 이력 때문에? 음악에 관해 문학적 권위(?)가 있는 하루키는 브람스의 피아노곡에 대해 "가끔 들으면 멋지지만, 매일 들으면 피곤해지고, 따분하기도 하다"라는 평을 했다. 꼭 사랑에 대한 정의같지 않은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음악 앱을 열어 브람스를 검색한다. 피아노로 쳤던 〈헝가리 무곡 5번〉, 익숙한 자장가와 왈츠, 영화 〈색계〉와 드라마 〈밀회〉에 삽입된 곡까지 하나하나 들어 본다.
그의 콘체르토는 잔잔하게 시작되어 어느새 격정적이 되고, 환희에 차오르는 듯하더니 금세 잦아들기도 한다. 일상적인 삶에 가끔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같다. 그러나 시몽의 말대로 브람스든 아니든, 폴이 브람스를 좋아하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저 폴의 관심을 잠깐이라도 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말줄임표다. 그것은 물음이 아닌 권유나 애원으로 들리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닿은 손들을 생각했다. 쓰다듬던 손, 커다랗게 감싸는 손, 살짝 건드리는 손, 번쩍 안아 올리던 손, 머리카락을 훑어내리던 손, 술잔을 기울이는 손, 책장을 넘기는 손, 위험한 거리에서 안전한 방향으로 인도했던 손, 운전대를 잡은 왼손과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뻗어서 보호해주던 오른손, 악기를 다루는 손, 마음을 남기는 손과 펜을 들어 자신만의 글을 쓰고, 지나칠 수 없이 아름다운 문장을 옮겨 담았을 그 손을.
책 정보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글, 김남주 옮김, 민음사 펴냄
인용한 글 :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글, 홍은주 번역,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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