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작은 여행을 위한 짐을 꾸린다. 어김없이 어깨에 걸쳐 메는 에코백에는 휴대폰과 이어폰, 플래그, 카드지갑과 립글로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좀처럼 변함없는 소지품들과 달리 책은 수시로 드나드는 객이기에, 도서관은 사흘에 한 번 꼴로 들러야 하는 정류장이 된다. 그곳에 들러 보내기 아쉬운 승객을 내려주고,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한다.
다른 무엇보다 도서관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었는데, 지난해에 그 바람을 이뤄 도서관 맞은편 집에 살게 되었다. 새어 나오는 저녁 불빛이 유달리 아늑한 집 앞 도서관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슬렁슬렁 다녀올 수 있어 좋고, 주말에 빈둥대다 문득 보고 싶어지는 책이 생겨도 든든한 구석이 있다. 도서관의 조명이 꺼지기 직전까지 남아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 수도 있다.
그곳이 책꽂이가 줄줄이 병정처럼 나열되어 있는 경건한 도서관이 아니어서 더 좋다. 층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서가가 있고, 한쪽 서가 뒤편에는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일인용 작은 책상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맞은편 서가 뒤쪽으로는 단단한 벽 대신 하얀 그물망이 햇살을 통과시키며 책들을 은은하게 받쳐 주어 아늑한 분위기에서 고르고 읽을 수 있다.
즐겨 찾는 또 하나의 도서관은 회사 도서관이다. 업무를 위한 책들 못지않게 독서경영을 위한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다. 공공도서관에 비하면 회사 도서관은 인적이 드물고 아무도 없을 때가 더 많아서 일에 사람에 지칠 때 잠시 숨을 고르는 공간이 되어 준다. 그곳에서 많은 책들이 고요하게 나를 기다리고, 그 고요가 지친 나를 달랜다.
나는 도서관을 떠올릴 때마다 도서관이 세월을, 시간을 그러니까 끝내는 사라졌을 기억들을 수납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을 통해 우리는 잊혔을 사건과 말과 지식을 건네받는다.
- 《아무튼 서재》 중에서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잠을 가만히 깨운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 듯 생기와 총기를 머금고 내게 말을 건다. 어떤 말은 근엄하고 진지하며, 어떤 말은 다정하고 간지럽기도 하다. 누구도 펼친 적 없는 책을 처음으로 넘길 때면 새 종이와 잉크 냄새가 훅 끼치는 것이, 내가 책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고 책이 첫 숨을 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주 가는 곳이든 아니든 내게 도서관은 호흡이 가빠지는 장소다. 그러니 도서관에 들어서면 먼저 심호흡부터 한다. 찾을 책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다른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훌훌 둘러본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허리를 조금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고, 손가락을 뻗어 책등을 짚어가며 조심조심 살핀다.
그러다가 어떤 침묵의 부름이 느껴지면 책을 뽑아 들고 앞장과 뒷장, 속장의 목차까지 꼼꼼하게 살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싶다가 망설인다. 도서관에 가면 욕심을 부리지 말자는 다짐이 필요하다. 금방 다시 올 테고, 이미 다른 책들이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다. 그렇다 해도 음, 아무래도 새치기를 묵인해야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자기 친구를 얻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점차 자기 자신의 장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 그 작은 장서는 그에게 혹시 작은 세계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 《헤세의 문장론》 중에서
헤세는 자신만의 장서를 갖추라고 말했지만, 나만의 장서는 아주 조그마해도 상관없다. 나에게는 이렇게 커다랗고 든든하며 뭇사람과 공유해서 더 좋은 장서가 곁에 있으니. 도서관과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며, 나에게 주어진 행운에 흠뻑 젖어드는 중이다.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멋진 도서관이 바로 앞에 있는데 보러 갈래? 하고 묻곤 했는데 아무도 도서관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저렇게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인데... 늘 조금 실망했지만 곧 괜찮았다. 그래, 거긴 나만의 장소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워,라고 생각하면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천국은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책 《픽션들》에 실린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은 하나의 커다랗고 무한한 우주이며, 책들은 그 속에 가득 들어찬 창조적이고 개별적인 또 다른 우주였다. 그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의 세계는 얼마나 넓어지고 또 깊어지고 있을지. 그 속에서 건져낸 작은 우주를 품지 않고 떠나는 여행을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인용한 글
《헤세의 문장론》 헤르만 헤세 글,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펴냄
《아무튼 서재》 김윤관 글, 제철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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