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 전부터 필독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이야기인 줄 몰랐다, 누가 선정했느냐, 더 읽을 수 있겠다와 없겠다로 여론이 나뉘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며 내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아름답고 찬란하다는 생각. 한 문장도 평범하지 않을 만큼 온갖 섬세한 은유에 빠졌고, 인물의 삶과 사랑에 대한 고뇌에 공감했다. 나의 편견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에 묻혔다.
루드비크가 베니에크와 야누시에게 느끼는 호감과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에 빠진 과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순간의 떨림과 망설임, 숨고 싶은 마음과 건네고 싶지만 맴도는 말들이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렘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할 때 아주 작은 존재가 되면서도 동시에 아주 커다랗게 부풀 수도 있다.
너는 강인하고 튼튼한 손으로 나를 새로이 그려내어 재창조했다.
이 책이 아름다운 건 작가의 언어적 감각과 역량도 있겠지만, 그들의 사랑을 향한 편견과 거부감 때문에라도 가능한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했던 의무와 사명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없는 연민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연민을 바란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인정과 편견 없는 동등한 시선이면 충분할 것이다.
루드비크는 야누시로부터 자신을 ‘함부로’ ‘재단하려 들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타고난 성향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체성을 애써 숨겨온 이에게 그런 이해와 인정은 얼마나 큰 해방이 되었을까. 작가가 표현한 대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알아볼 기회를 살면서 몇 번밖에 가지지 못한다.
동시에 사랑이란 아무리 마음을 다해도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된다. 루드비크는 체제에서 구속을 느꼈지만 야누시는 그 안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루드비크는 자유를 찾아 달아나고 싶어 했고, 야누시는 편안한 삶을 보장해 줄 대상을 어떻게든 사로잡으려 했다. 이러한 차이를 대면하는 일은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을 얼마나 쪼개 놓는지.
내 인생은 벗어날 문 하나 없는 작고 비좁은 복도이자, 너무 비좁아서 팔꿈치에마저 멍이 드는 일방통행의 터널이었다.
루드비크가 몰래 읽고 야누시에게 전하는 《조반니의 방》에도 그저 사랑이 필요했던, 그로 인해 무너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비극은 루드비크 자신의 비극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책은 그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종종 위안을 받는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게 아니라는 생각, 누군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루드비크는 체제와 성소수자라는 이중의 구속을 견뎌야만 했다. 어둠은 억압이고, 헤엄은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좋게 생각하든 아니든, 나의 생각이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생각은 실질적 억압이 되어 그들을 옥죈다. 폴란드인들이 겪은 역사적 아픔은 치유되어야 하고, 성소수자로서 받은 핍박은 당연한 것일까. 어떤 억압은 나쁘고 어떤 억압은 해도 되는 것일까.
얼마 전 서울광장에서 퀴어 축제가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각국 대사관들과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종교 단체와 일부 기업들도 참여했다고 하니 예전보다 진일보한 사회적 관심이 반갑다. 그러나 왜 굳이 이런 행사를 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정민석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은 그 이유를 ‘나 자신을 안전하게 드러낼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매 순간 인정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런 욕구가 얼마나 빠르게 다시 치고 올라오는지는 SNS를 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의 편견에 부딪칠 때, 법과 질서가 인정하지 않는 것일 때 욕구는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이자 갈망이 되고 한 인간은 정체성을 잃고 내부에서부터 파괴될 수도 있다.
각자의 도덕과 윤리가 있을 것이다. 각자가 다 옳아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입장 안에서만 옳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스티븐 핑커는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의 말을 인용했다. "'나'라는 대명사에는 어떤 마법이 있기에, 나로 하여금 공정한 진리의 결정을 떳떳이 뒤엎게 하는가?" 여기서 ‘공정한 진리의 결정’이란,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 한, 스스로가 자기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라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밖에 생각할 수 없으므로 편향적이 된다. 나와 관계된 일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만, 경험하지 않아서 내가 잘 모르는 일마저 나의 기준으로 쉽게 판단해버린다. 대체로 미숙하고 늘 부족하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매번 잘못을 저지른다. 자꾸만 잊게 되는 나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읽는 것만이 내가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다.
성소수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축제의 슬로건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였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지를 보자.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측도 이유는 있겠으나 결국은 누군가의 삶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정당하며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반대해야 하는 것일까. 그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축제에 참여했던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대사의 말을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