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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Sep 26. 2022

카오스와 코스모스


2박 3일의 여행을 위해 친구들과 만난 순간, 우리는 서로의 짐을 보고 놀랐다. 3인 가족이 셋, 4인 가족이 하나였는데 다른 가족들은 수하물용 28인치 캐리어에 추가 가방을 가져온 반면, 우리 가족은 달랑 기내용 24인치 가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인당 캐리어 하나씩이 아니고 그거 하나뿐이냐고 친구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돌아가는 공항에서도 짐이 많은 친구들은 쌌던 캐리어를 다시 풀어 필요한 물건을 찾아 헤맸다가 꾹꾹 눌러 담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큰 가방을 가지고 왔어도 여행을 하는 동안 친구들은 갑작스럽게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모두 나를 찾았다. 이번에도 세 건의 질문을 받았는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혹시 바늘이랑 실 있어?
손톱깎기 있어?
면봉도 있어?


비상용품을 챙겨 다니는 나의 습관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하물 찾기가 번거로워서 가능한 짐을 줄여온 이번 여행에서는 그 요구를 다 충족시켜주지 못했마침 갖고 있던 손톱깎기만 건넸다. 바늘과 실, 손톱깎기는 자주 들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면봉 있냐는 질문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참신해서 푸하하 웃고 말았.



회사에서도 사람들은 뭔가가 필요해지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온다. 바늘과 실이 가장 즐겨 찾는 품목이고 두통약과 상처에 붙이는 밴드, 실핀, 옷핀, 스테이플러 심, 연필깎이, 풀, 리어파일, 양면테이프, 건전지, 마우스그 뒤를 잇는 주요  품목이다. 친구들의 커다란 캐리어만큼이나 회사 동료들의 자리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내 책상은 휑한 편인데 어떻게 필요한 물건들을 다 갖고 있냐고 신기해하면서 만물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깔끔한 책상을 좋아해서 내 물건들은 모두 서랍 속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정리가 안된 책상을 보면 내 마음까지 어지럽고 답답해졌다. 그런데 김윤관 작가의 《아무튼, 서재》를 읽고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외부인’인 내가 보기에 정신이 없을 뿐, 책상 주인들에게는 안정적이고 질서 있는 자신만의 공간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작고 단정한’, ‘정리가 잘 된’이라는 기준은 구경꾼의 기준일 뿐 실제 책상을 쓰는 주인의 시각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폴 스미스 역시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카오스가 어디 있냐고 말하지만, 내게는 더없는 질서가 잡힌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책상을 ‘카오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책상과 상관없는 외부인일 따름이다. 정작 책상을 사용하는 폴 스미스에게는 ‘더없는 질서’가 있는 책상인 것이다.



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둔 것들이지만 누군가에게 절박한 물건을 내주는 기분도 꽤 괜찮다. 고백하자면 다른 팀에서까지 야금야금 빌려간 뒤 돌아온 적 없고 내가 필요할 땐 늘 없다는 사무용품 구매서를 다시 올릴 때는 섭섭 감정이 피어오른 적도 있다. 그렇지만 사소한 무언가를 내주면서 불만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건 아무래도 밑지는 일이다. 그냥 나를 잘 알아서 나의 우주를 찾는 사람들을 반기기로 했다. 그들의 우주는 그 밖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을 테니.




여행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첫날,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한 명의 특별한 고객이 나를 찾는다. "바늘이랑 실 있어요?" 여행지에서는 없었지만 회사 서랍에는 당연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기쁜 마음으로 되물었다. 어떤 색 실이 필요하냐고.




인용한 글 : 《아무튼, 서재》 김윤관 글, 제철소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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