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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y 31. 2023

다정한 백반 한 상


정희재 작가의 책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읽다가 〈혼자 밥 먹기, 외롭지만 거룩한 시간〉이라는 글 제목을 본 순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낯선 동네에서 혼자 살던 시절이라 대개 친구들이나 남자친구와 번화가에서 식사를 함께 했는 매끼를 그럴 수는 없었다. 평소라면 대충 때웠을 텐데 그날따라 밥 다운 밥이 먹고 싶어 져서 집 근처 식당에 머뭇머뭇 들어갔다.


바쁜 한때가 지나고 9시가 넘어 손님이 끊긴 밤, 혼자 들어온 작은 체구의 여자애가 반가울 리가. 게다가 식당 직원분들끼리 한창 대화를 나누던 참이어서 환대는 받지 못했다. 번거롭지 않을 메뉴를 고민하자니 그때껏 시켜본 적 없는 백반뿐이었다. 제법 많은 양의 그릇들이 뚝딱 차려졌고 나는 민망하지 않은 척, 씩씩한 척 식사를 시작했다.


애써 거부하던 외로움이 내 앞자리를 차지하려던 그때, 직원 아주머니 한 분께서 그 자리에 털썩 걸터앉으셨다. 그리고는 동료에게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이런 걸 먹어줘야 된다며 젓가락도 대지 않은 생선구이를 발라 놓기 시작했다. 내가 민망해할까 봐서인지 다른 분과의 대화도 이어가며 TV도 보시면서 손만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발라진 생선살을 쏙쏙 집어먹기도 황송하고 안 먹기도 어려웠던 상황이었지만 고마웠다. 울컥하는 맛이었다. 입이 짧은 탓에 무슨 반찬이 나올지 몰라 백반은 잘 시키지 않던, 식어서 비리고 느끼한 생선구이 반찬은 관심 밖이었던 나는 그분의 배려 깊은 친절을 입은 후로 백반도 식은 생선구이 반찬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분의 행동은 몸에 절로 익은 직업적 습관일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친절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살면서 경험한 다정함 중에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일이다. 그날의 밥상은 반찬이 아닌 앞자리가 채워짐으로써 풍성해질 수 있었다. 속보다 겉이 더 매끌거리는 친절이었다면 잠시 웃음 짓고 말았을 텐데 무심한 듯 투박한 듯 그분의 배려는 무언가를 무릅쓴 한 사람의 저녁을 은근하게 보듬어주었다.




이 기억이 인상 깊게 남은 이유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임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나는 상황과는 별개로 일관되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싶었고, 타인에게 유일하게 기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가능하면 분쟁을 피하고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나를 답답하게 보는 지인들도 있지만 어쩌나. 플라톤과 배우 이안 맥라렌이 했다는 저 말의 울림이 크다는 걸 이미 경험한 것을.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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