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현대 소설을 이 책으로 처음 접했다. 나이지리아라는 생소한 나라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현지어에도 불구하고 가부장 중심 문화는 익숙했다. 책 날개에는 ‘나이지리아의 엄격한 상류 가정 출신 소녀의 정신적 독립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엄격한'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끔찍한 학대 가정에서 육체적, 정신적 탈출을 감행한 가족의 이야기다.
캄빌리 가족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아버지와 종교를 중심으로 생활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일과표를 만들어 놓고 계획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의 허락 없이는 자동차 창문조차 내릴 수 없다. 기대에 어긋날 경우 아버지는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뜨거운 물을 붓거나 임신한 아내를 유산할 때까지 때리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한다.
가정 폭력은 육체적, 정서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남기고 폭력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은밀히 이루어지는 탓에 외부인이 알 수도 없고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던 실화 에세이 《완벽한 아이》에서 보듯 현실은 소설보다 더 가혹할지 모른다. 두 아버지는 가족들을 철저히 지배하여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도구로 삼는다.
그런데 소란 없이 진행되는 학대 현장이 여느 폭력 가정과는 달라 보인다. 가혹 행위를 하는 아버지도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가족들도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수용하는 모양새다. 가스라이팅의 영향일까? 캄빌리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고 싶고, 아버지를 기쁘게 한 다른 가족에게 질투를 느낀다. 태어날 동생을 아버지로부터 지키겠다고 마음먹지만, 학대당하는 엄마를 보면서도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성공한 가장인데다 어려운 이웃과 지역 사회를 돕는 데 앞장서고 있으며, 독실한 신자로 종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다. 정치적으로는 반정부 활동을 지지한다. 아버지는 신을 섬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신이 되고 싶은 자다. 가족과 이웃들에게 하사하는 음식과 돈은 생명과 은총을 베푸는 행위이며, 십계명처럼 규율을 정하고 벌을 내리며 신 행세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기에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두 가지 입장에서 모순을 드러낸다. 그에게 아버지라는 역할은 권위 그 자체이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이보족 민속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한다. 그렇게 살아있는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고, 기독교도였으며 고인이 된 장인을 찬양한다. 또한 가정에서는 독재를 휘두르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권력에 대항한다. 성장을 가로막는 폭력적인 가부장을 무너뜨리는 일은 신화와 혁명의 공식인데, 캄빌리의 아버지는 혁명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전통 사회와 단절을 선언한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의 배경에는 어떤 맥락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나이지리아에는 고질적인 종족 분쟁인 민속신앙과 이슬람의 종교 갈등이 있었다. 영국의 지배 이후에는 그리스도교와의 분쟁까지 더해지고 부의 불평등까지 심화되어 내전과 쿠데타가 계속되고 있다. 식민 역사는 종식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정치, 종교, 지역적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세상을 완벽하게 차단해 왔지만, 고모네 집에서 지낸 단 며칠의 경험으로도 아이들은 눈을 뜨게 된다. 고모 집에서 캄빌리가 본, 색이 다른 히비스커스 꽃은 자유와 희망을 상징한다. 고모네 가족과 할아버지, 아마디 신부는 캄빌리 남매에게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창이었고 자유를 침해하는 조국을 떠나려는 고모의 결정도 캄빌리에게는 작은 절망이자 큰 희망이 된다.
사촌 오비오라는 아마디 신부에게 종교와 억압은 뒤섞여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은 의심과 판단을 허용하지 않고 인식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의지는 좁은 틈 사이에서도 터져 나오는 새싹과 같다. 《완벽한 아이》의 화자가 책과 음악과 동물에게서 의지를 얻은 것처럼 캄빌리와 오빠도 짧은 만남을 통해 스스로 거대한 벽을 무너뜨릴 힘을 얻는다. 집에 복귀한 오빠는 영성체를 거부하고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으로 변화를 예고한다. 견고한 권위일수록 한 번 금이 가면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캄빌리 가족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했고 그에 따라 또 다른 고난과 책임을 함께 짊어지게 된다. 이들 가족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여전히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전과는 다르게 활짝 열린 세상이 그들을 기다린다. 아마디 신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로 캄빌리의 상처를 위로한다. 그의 말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책 정보 :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글, 황가한 번역, 민음사 펴냄
함께 읽은 책 :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글, 윤진 번역, 복복서가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