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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Apr 02. 2022

SF 소설의 90%는 쓰레기다

시어도어 스터전의 말에 담긴 의미는?


SF(Science Fiction) 장르 소설의 황금기를 대표했던 미국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1918~1985)은 순수 문학에 비해 장르 소설을 열등하게 취급한 평론가들을 겨냥해서 "과학 소설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0퍼센트 역시 쓰레기"라고 말했다. 이후 이 발언은 '스터전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장르 소설에 대한 저평가에도 그는 자기만의 철학으로 소설 쓰기를 계속했고, 이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시어도어 스터전 기념상'이 제정되었고 어슐러 르 권, 테드 창 등이 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훌륭한 과학 소설이란 과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인해 발생한 인간의 문제와 해법을 담은 이야기다.

- 《시어도어 스터전》, 현대문학 출판사 서평 中


'공상'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려 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흔히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말할 때, 단지 재미를 위해 이치에 맞지 않거나 근거가 없는 상상을 위주로 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SF 소설들은 현재의 우리 모습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도구로 과학적 상상력을 활용함으로써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과 그로 인해 펼쳐질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먼저 국내에서는 정세랑, 김초엽 작가의 작품들을 주목해 본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로맨스 장르로 구분되지만 SF 소설로도 흥미롭게 읽었다. 인간에게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주는 외계 존재와의 다정하고 독특한 사랑 이야기였다. 이계 생물체가 괴물보다 광물에 가깝다는 설정은 신선하면서도 있을 법한 발상이다. 이처럼 존재초월적이면서 화학적 사랑 고백을 하는 대상이라면 돌인들 어떠하리.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 기술로도 치유할 수 없는, 앞으로 더 커질지도 모를 인간 소외와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문장은 진화되는 기술로 달라진 세상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서야 찾아 헤매지 말자는 작가의 외침으로 들린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 갈 뿐인 게 아닌가.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테드 창은 완벽하게 구조적이며 신선한 자극을 주는 중단편 이야기들을 선보인다. 그만의 과학적 상상력이 삶이라는 접점에서 발현되는 이야기에서 빛나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동명 표제작은 고도로 지능화된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으로 인류의 한계를 조명하면서, 인지 방식이 달라진다면 차원까지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정을 보여준다.


언어학자 루이즈는 많은 노력으로 외계 생명체의 언어와 차원을 습득한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많은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욕망을 능력에 투영하지만 루이즈는 기쁨은 기쁨으로, 슬픔 또한 온전하게, 모든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에게 한계란 일방향의 시간과 제한된 언어체계가 아니라 루이즈가 보여준 삶과 사랑을 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숨》에도 시간을 다룬 단편이 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과거나 미래로 다녀올 수 있는 문을 넘나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이는 부유를 꿈꾸며 미래를 기웃거리고, 다른 이는 후회 때문에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나 미래에 묶인 삶이 어떠한지, 우리는 이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는 버튼을 누르기 1초 전, LED가 빛나는 예측기가 등장하는데, 이 작용 하나로 인간들이 의지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게 된다. 두 장 분량의 이 짧은 단편이 삶과 의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 주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 테드 창, 《숨》




중국계 미국인이자 프로그래머와 변호사로 일한 이력을 가진 켄 리우는 테드 창과는 또 다른 결의 매력을 가진 작가다. 국내에 소개된 두 단편집 《종이 동물원》과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를 통해서 만난 그의 이야기를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라는 변화 속에서의 인간성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를 짊어진 개인의 서사였다. 그는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고, 그 힘이 독자에게 닿아 희망적이고 단단한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전했다.


미래를 예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삶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에는 희망이 존재한다.

- 켄 리우,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작가의 말 中




책 정보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난다 펴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펴냄

《종이 동물원》 켄 리우, 황금가지 펴냄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황금가지 펴냄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엘리 펴냄

《숨》 테드 창, 엘리 펴냄


Photo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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