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켜 있던 순간, 혼탁했던 시절의 기억이 어느 시기가 되면 조금씩 이해되면서 맑아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 같은 경험은 내가 소설이라는 장르에 기대하는 바다. 좋은 소설을 읽고 느낀 감정이나 깨달음이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녹아드는 경험은 짜릿하기까지 하다.
백수린의 소설 《여름의 빌라》 속 인물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제외한 일곱 개의 단편들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인물이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인물들은 낯선 장소에서 다른 삶의 결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균열을 경험하고, 정리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던 감정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찬찬히 되짚는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씩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
첫 단편 <시간의 궤적>은 화자와 낯선 나라에서 의지했던 친구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회상을 통해 바라본 과거의 자신은 불안을 의지하던 대상에게 투영했고, 관계가 틀어지게 된 이유가 대상에게 있다고 믿은 것으로 보인다. 정서의 안정을 찾은 현재의 화자는 미안함을 느끼지만, 사과나 화해의 손길도 이기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에 그와의 인연을 과거에 남겨둔다. 이러한 성장은 지난 미숙함을 돌아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표제작 <여름의 빌라>에서는 한국의 젊은 부부와 독일 노부부의 만남으로 동서양의 역사가 만들어 낸, 삶의 격차라는 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젊은 부부는 비정규직의 삶이 늘 불안한 반면 독일인 노부부는 휴가 때마다 세계를 여행하는 안정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늘 관대하고 호기심이 넘치지만, 여유가 없는 이는 그들의 포용이 달갑지 않으며 현실의 고됨에 그들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으로 남은 여행 뒤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독일 여성은 화자에게 사과와 함께 세월의 폭력에 대해 고민했다는 편지를 전한다.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는 말에 화자도 공감하며, 어긋남 속에서도 함께 했던 시간의 의미를 찾게 된다.
<고요한 사건>은 화자의 가족이 재개발을 기대하며 산동네로 이사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되짚고 있다. 화자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의 사는 모양새가 달랐다는 걸 모두가 알았지만, 그럼에도 화자를 받아준 두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날, 화자는 그중 한 친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이 친구들과 자신이 삶에서 만나는 교차점이 거기까지라는 서글픈 사실도 깨닫는다. 그즈음 골목에서 죽은 고양이 소동이 일어났고 화자는 동네 사람들과 자기 가족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먼지도 알게 된다. 그는 죽은 고양이를 묻어 주고 싶었지만 쌓인 눈이 만든 새하얀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그날의 경험은 자신이 그 같은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란 예감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흑설탕 캔디>는 유품으로 남긴 일기장을 통해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된 손녀의 이야기다. 비슷한 연배에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할머니였지만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동행한 낯선 나라에서의 삶은 듣지도 말할 수도 없기에 고립된 삶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위로가 된 것은 이웃과의 음악적 공감이었다. 특별한 우정이 할머니의 삶을 다시 빛나게 할 무렵, 할머니는 가족을 따라 귀국하게 되었고 가족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남동생에게는 그저 외국 할아버지와 사귀었던 할머니의 일화가 재미난 얘깃거리였지만, 일기장을 통해 엿본 할머니의 삶에 고독과 아픔, 우정과 사랑과 이별이 녹아 있었음을 손녀는 알게 된다.
자아가 이해하는 세상과 현실이 어긋남이 없을 때, 타자의 알 수 없는 행동은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질성과 한계는 자아를 위축되게 하지만, 낯선 장소라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 알 수 없는 타자는 자아가 알지 못했던 한계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배움이 되고 자아가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타자와 타자의 세계를 인정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인물들이 회상하는 만남의 배경에는 소득 격차와 비정규직, 재개발, 이혼 가정, 결혼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이민 등 현대 문제가 맞물려 있다. 문화적 · 사회적인 격차로 인한 ‘다른 삶의 결’은 인물들 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평온한 일상에 흠집을 내지만 그 짧은 만남이 없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무언가를 남긴다. 직선의 삶에서 어긋난 것처럼 보이던 경험이 고유한 무늬를 그리며 삶의 궤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는 것,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그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백수린의 단편들은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책 정보 : 《여름의 빌라》 백수린 글, 문학동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