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지치고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나는 감당하기 힘든 혼란을 겪을 때면 낯선 골목길을 찾아가 무작정 걷곤 했다. 그러다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환기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장소가 가진 힘을 믿는다. 그런 곳이 누군가에게는 고향일 수도 있고 여행지일수도 있겠지만, 《밝은 밤》의 지연에게는 어린 시절에 밤하늘의 은하수를 인상깊게 보았던 바닷가 근처의 소도시 희령이 그러하다.
이혼과 이사, 이직과 같은 큰일들을 한꺼번에 겪으며 혼자 떠나야 했던 지연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사람이 싫으면서도 간절히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마음을 씻어 널고 싶었던 지연은 위로가 간절히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가족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남편에게 배신을 당했고, 할머니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멀어진 엄마는 늘상 충고로 시작해서 서로 모진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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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자식도 부부도 독립된 타자이기에 그 사이에는 행성과 행성만큼이나 먼 간극이 존재하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대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를 옳다고 믿는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고 무례해져서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확신은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며, 자기 확신을 근거로 한 충고나 강요는 가족에게도 폭력이 된다. 이를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지연과 할머니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관계에 지치고 외로운 지연에게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교감할 수 있는 이가 필요했기에 할머니와의 교류가 도움이 되었다. 할머니는 지연과 닮은 할머니의 엄마 사진을 지연에게 보여주었고, 지연은 증조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된다. 그 먼 옛날의 이야기가 어떻게 지연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을까.
시대와 인식은 변화했어도 세상의 편견은 여전히 여성들을 힘들게 하고, 자신을 지키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증조할머니는 출신때문에 천대받고 여성에게 더욱 험한 시절을 살았다. 세상에 실망하고 상처받지 않는 방법으로 그는 체념을 선택했고, 딸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딸은 부당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둘은 남자가 여자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고 생각하는 지연의 엄마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는 지연만큼이나 달라서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하고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라면, 반대로 구원도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증조할머니 삼천의 가혹한 삶에는 다행히도 새비네가 있었다. 처음에는 삼천이 도움을 주었지만, 새비는 삼천의 신분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주고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할머니에게는 희자와 명숙 할머니가 그런 사람이었고, 지연의 엄마에게도 명희 언니가 있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의 아픔을 돌보고 기댐으로써 함께 치유하고 위로하며 삶을 이어나갔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들에게 편견없이 마음을 주었던 새비 아저씨를 죽인 것이 한낱 먼지와도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지연은 새삼스럽다. 관계로 인해 고통스러운 현실과는 달리 우주는 광활하고 고요하다. 끝없이 팽창하는 어두운 공간 속에 남겨진 별과 같이 우리는 외로운 존재다. 지연은 우주와 별에게서, 그리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서 혼자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들에게 이별은 필연이다. 의미가 클수록 상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회피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할머니가 희자와 연락할 수 없었던 이유, 엄마가 언니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것, 지연이 결혼을 통해 도피하려던 원인은 진실을 마주하고 인정하기가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이 바래지도록 두지는 말아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 2>에서 철학자는 ‘우리는 헤어지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의 이별’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한 경험을 통해 인물들은 그들을 떠나 보낼 수 있고 자신의 상처를 직시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엄마는 과거 사진을 꺼내볼 수 있게 되었고, 할머니와 희자도 다시 만날 것을 예고한다. 지연은 도피가 아닌 도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강아지를 잃고도 다시 고양이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밝은 밤》은 삶이라는 투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여성에게 특히 가혹했던 역사 속에서 보듬고 의지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삶의 의지가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까지도 명맥을 이어가며 누군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야기이다. 지친 어깨지만 기꺼이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이들과 함께라면 깜깜한 밤과 같은 삶의 여정에도 밝은 빛이 깃들 수 있을 것이다.
책 정보 : 《밝은 밤》 최은영 글, 문학동네 펴냄
함께 읽은 책 : 《미움받을 용기 2》 고가 후미타케 · 기시미 이치로 글, 인플루엔셜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