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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Apr 20. 2022

냉장고에 보관된 자본주의

문장과 세계 #5


이전 글에서 살펴본 음식 문화 흐름을 대기업은 정확하게 읽어내고 활용하고 있다. 음식 상품 정기구매 약정을 맺으면 가전제품을 할인해주는 제도가 등장한 것이다. 바야흐로 약정의 시대다. 이사를 하면서 목돈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6개월부터 30개월까지 약정 기간 중에 6개월을 선택했다. 매번 시켜 먹거나 외식을 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재료를 확보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약정은 전자제품 판매 기업과 음식 상품을 판매하는 업체 제휴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지불을 먼저 하느냐 나중에 하느냐의 차이로 보이기도 하고 어차피 구매할 만큼이겠거니 생각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볼 때는 고객을 긴 기간 동안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그러다 보면 충성 고객이 될 수 있으며, 추가 구매의 가능성도 있는 남는 장사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언젠가 철학자 강신주는 칼럼에서 냉장고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로 칭하며 자본주의와 냉장고의 상관관계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드라마 속 부잣집이나 성공한 연예인의 집에서 봤던 여러 대의 냉장고는 그가 말한 대로 자본을 상징했다. 몇 년 뒤, 두 대였던 부모님 댁 냉장고도 네 대가 되어 있었다. 두 분 식사량으로는 어림없는 그 음식들은 대부분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공간이 많아지면 채우기 마련이어서 부족한 건 여전하다고 하시는 걸 보고 냉장고의 쓸모 다시 고찰할 수 있었다.


칼럼에서 본 선언이 마음에 남아서였을까, 얼마 전 이사를 오면서 냉장고를 두 대에서 한 대로 줄였다. 아니, 그보다는 식사량이 줄기도 했고 무엇보다 넓지 않은 공간을 다른 용도로 쓰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남편도 고민 끝에 동의해 주었다. 4 분할 중 하나가 냉동, 또 하나가 김치다. 부족할까 걱정했지만 알맞게 구매하는 게 익숙해지니 적응이 되었고, 우리 집 식생활 습관에도 적당했다.




나는 먹는 양이 많지 않고 손도 작아서 장을 소량으로 보는 편이다. 집에 놀러 오는 지인들은 내 살림을 보고 소꿉놀이한다고 놀리기 일쑤다. 가족 모두 입이 짧다 보니 식재료는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칠만큼 구매하고 오래 먹는다. 육류 소비줄이려다 보니 국 끓일 때 사용하려고 구매했던 고기 300g을 3개월 동안 먹었다. 3인용 밥솥으로 끼니마다 쌀 1.5컵으로 밥을 짓는데, 그것도 양이 많아 줄여가고 있다. (빵, 돈까스, 탕수육은 줄이지 못했지만)


이런 나에게 10만원씩 매달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건 편리함보다는 숙제로 다가왔다. 냉장과 냉동, 상온, 제휴사 제품별로 각각 배송비가 부과되므로 선별도 필요했다. 냉장이나 냉동 제품은 커다란 아이스박스 배송된다. 현관 앞에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상자들을 을 땐 기대보다 심란한 마음이 컸다.

그래서 주로 상온 제품으로 구매했다. 금액을 채우기 위해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오래 둘 수 있는 부침가루나 케첩, 라면과 소스류로 골랐다. 파스타를 구매하려고 제휴사 제품을 담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피클에서부터 월계수 잎, 페퍼론치노, 토마토 페이스트 등등 그냥 한 번쯤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들까지 사게 되다. 소식 인간이 그걸 다 언제 쓰려는지.


한 번은 라면사리 10개를 산다는 것이 5개들이 10 봉지가 도착해 있어서 기함을 했다. 가족들도 박스 크기에 놀라고 실수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좋아하는 품목이었기에 숨길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라면사리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모르겠다.


오늘 점심도 약정을 통해 구매한 레토르트 죽이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좋긴 하지만, 구매 의무감보다 월등히 좋은 것은 아니어서 이 달을 마지막으로 더는 연장하지 않을 계획이다. 부족한 시간과 요리 열정을 가지고 이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 건강한 식생활을 영위해나갈 것인지 고민이 더 필요하다.




인용한 글 :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www.khan.co.kr/print.html?art_id=20130721213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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