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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Dec 13. 2023

님아, 그 경계를 넘지 마오

신중과 경솔, 그 경계인이 나였다.

선생님과 일곱 회기 만에 개인 상담을 매듭을 지었다. 그림책 테라피라는 집단 상담으로 6년 동안 선생님과 함께 만든 토대 위에 진행된 치료였기에 짧은 회기에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더불어 개인 상담과 함께 추천하신 책을 기준 삼아 병행한 <우울의 무게> 연재도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상황은 우울증 약 복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만큼 극단적으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내 몸에 맞는 약을 찾기까지 극심한 고통과 시간이 소요되고, 결국 찾지 못하는 결과에 닿을 수 있다는 경험자들의 조언이 무서웠다. 먹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도 없었다. 위장 장애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부정맥으로 버겁게 뛰는 심장이 걱정이었다. 각종 호르몬의 재흡수를 억제하면 제일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 뻔했다.   


24시간 곁에 있을 수 없는 선생님을 대신해 나를 지켜 준 책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었던 내가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나를 만나며 그들의 존재에 경탄해 마지않다, 여기까지 살아온 나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쉽게 되지는 않았으므로 그들의 사연에 동화되어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더 크게 살 찌운 것이 선행되었다.  


엄마의 언어를 이해하고 난 뒤로 세상이 뒤바뀌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바뀌었다. 세상은, 타인은 바꿀 수 없지만 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실감 나게 경험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신뢰를 처음으로 가슴 가득 품었다. 불편한 마음은 그대로이지만 엄마의 언어 너머로 꽁꽁 감춰 둔 당신의 연약함이 보였기에 다치지 않았다. 상처받지 않는 내가 신기해 자주 전화를 걸어댄다. 예민한 엄마는 당신 딸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을까?






하지만 사십 넘어 처음으로 맞이한 변화에 너무 흥분한 탓일까? 도가 지나친 참견으로 타인의 마음에 꽤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 사람의 말대로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조언을 구한 것도 아닌데, 한때 내가 했던 고민이라는 핑계로 충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건드렸다는 그 사람의 메시지를 접한 순간, 경솔함은 타인과 나 사이 진심과 최선을 왜곡과 축소라는 부적상관관계의 결과로 도출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자괴감에 다시 나를 탓하려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였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

가장 힘들고 아플 때 곁을 지켜주며 함께 아파하고 때론 화를 내며 일으키던 사람들이 내게 해 준 말이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성숙한 사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상담을 종결하던 날 선생님이 비춰주신 나의 모습은 더 이상의 자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결점. 그들의 말을 '철학자의 돌' 삼아 나의 단점을 해답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필요한 때였다. 다시 지난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내가 결정적으로 보지 못한 나의 그림자 조각이 무엇이었는지 찾기 시작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어떤 관계들은 모두 나를 경청자로 소환한 관계였다. 힘든 마음을 토로할 곳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낼 때면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부분 아이의 문제로 고민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므로 그 이야기는 내 고민이 되고 아픔이 되었다. 그 속을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비단 양육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가 한 번 아파봤던 경험을 가지고 온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곧 그 사람이 되었다. 이번 문제도 그랬다. 이제 막 자신의 공간을 열어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읽히는 글을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를 위한 글을 쓰면 좋아, 확신을 가져."라는 공개성 댓글이 시나브로 문제가 되었다.


브런치에 처음 입성하고 초심자의 행운을 맞은 나는 조회수 10만을 찍은 글이 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알림에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듯한 흥분과 기쁨을 누리며 자축했다. 곧이어 다른 글 하나가 다시 6만을 찍으며 핸드폰을 울리기 시작했고 이러다 브런치 인기작가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과대망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발행해야 할 글을 두고 그만 부러졌다. 남들에게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단 한 줄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렇게 100일을 절필하며 브런치를 떠나 있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우울감이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문장에 낚여 올라오고 말았다.


좀 더 신중하게 남겼어야 했는데, 편하다는 이유가 나의 경솔함에 불을 지폈다. 그렇게 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내가 쫌 해 본 고민인데~'라는 오만함으로 쓸데없는 도움을 자처했다. 그 사람은 공개적인 댓글로 자신에게 가르치려 들려는 나의 의도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아무렴, 나쁜 의도는 없다. 나는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므로. 단지 그 사람의 회의가 글을 쓰는 장애물이 될 것 같다는 선 넘은 지례짐작이 저지른 말이었다. 청하지도 않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우리는 참견씨라고 하지 않던가.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부류의 인종이 되고 말았다.






단지 돕고 싶은 마음으로 행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타인의 어려움에 나의 경험을 접촉시킴으로써 타인과 동일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나를 인정해야 했다. 그 어려운 감정을 다시 겪는 일이 내게도 힘든 일이었으므로 빨리 해결을 보고 그 감정에서 멀어지고자 했음을 알아야 했다. 타인과 나는 다른 사람인데, 그를 나처럼 나를 그처럼 보며 매번 오만하게 해결책만 제시해 대는 사람이었다.


어린이집 부모교육에서 만난 비폭력 대화 강사님은, 모든 대화를 "감사"와 "요청"으로 분류하면 폭력적인 대화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는 '그 이외의 말은 그냥 들어주세요.'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공감하되 동화되지 말고 타인과 나를 동일하게 여기는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백번 이론은 한 번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 뼈아프게 나의 단점을 마주해야 했지만, 틀이 깨지고 판이 뒤틀리는 변화 속에서 아노미는 당연한 진통의 과정일 것이다.


신중한 겸양을 갖춘 만큼 버티지 못하는 경솔을 갖춘 나는 경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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