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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Dec 20. 2023

이제 나와의 간격을 넓힐 때

타인을 대하듯 나를 대하기로 했다.

우쿠렐레를 배울 때였다. 오선지에 콩나물 닮은 음표가 그려진 악보와 다른, 손가락 번호를 읽어 연주할 수 있는 기타, 우쿨렐레 연주 전용 악보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타브라고 부르는 이 악보는 전지적 연주자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악기의 위치를 악보로 옮겨 놓은 것으로 오선악을 볼 줄 몰라도 기타나 우쿠렐레를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악보다.

오선악 아래 타브악

생경한 타브를 처음 만나게 되면 자리 인지가 어렵다.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나는 이전에 타브 악보를 배우다 자리 인지가 엉키면서 우쿠렐레를 포기한 전적이 있다. 때문에 다시 만난 악보 앞에서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제가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져서, 이 악보 보다가 우쿨렐레 포기했어요."

그런데 어쩌지? 내 옆에 분이 심각하게 타브를 읽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 그분에게도 비수가 되었을까? 끝내 눈물을 흘리며 읽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그분을 보며 사과하지도 못하고 좌불안석했던 기억이 있다.   


못하면 못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며 노력하면 그만인데, 굳이 단점을 꼬집어 세상에 공표해 버리는 인간이었다. 만약 친구로서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었다면 어땠을까?

"너 공감 지각 능력이 떨어져서 이 악보 못 보는구나!"

이런 말 하는 사람을 친구로 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도 친구하고 싶지 않다. 남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나에게는 잔인하게 해 대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와 비슷한 상황의 인간의 마음에도 에두른 화살을 꽂고 마는 사람이었다.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하는 언행이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 주변에는 친구가 없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나에게 엄혹한 사람이 타인에게 한없이 베푸는 이해는, 그 사이 간극이 크고 명확해서 가식이란 생각이 들뿐이다. 사랑도 받아 본 놈이 잘 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글로 배운 사랑을 경험 없이 베풀었으니, 참견과 관심의 경계도 세울 줄 모른 채 불쾌한 친절만 베푸는 피상적인 인간이었다.


수치의 늪에 빠진 생각은 헤어 나오지 못하고 비난의 말만 양산해 냈다. 스스로 프로스쿠테스가 되어 나를 침대에 옭아매고 잘못한 부분을 떼어내기 바빴다. 스스로에 대한 힐난을 입 밖으로 쏟아내며 나를 웃음거리로 전시하기 바빴고,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처음 마주한 타브 악보 앞에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당혹스러움을 배려할 줄 모른 채, 좋지 못한 방법으로 '좋은 사람' 등급을 낙인 받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리는 수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상황을 책임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실수를 반복하도록 우리를 옥죄는 것은 바로 수치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건전한 행동을 명확하게 보고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까? 유해한 수치심 대신 건전한 분별력을 적용해야 한다. 분별력은 상황을 명확하게 평가하긴 하지만, 좋거나 나쁘다는 꼬리표를 붙이진 않는다. (P165)
<마음 챙김> 사우나 사피로 지음, 안드로메디안

자책은 갈등이나 문제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다. 타브 악보를 배우는 과정에서 내가 한 자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공간 지각 능력이 떨어지는 나'라고 자책하며 타브 악보 보기를 포기했다. '다 내 탓이다.' 하고 자책하는 사람 앞에서 무력해지는 이유다.


책 <마음 챙김>에서는 실수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대신 명확하게 보기를 권한다. 비록 끓어오르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겠지만, 느껴지는 수치심까지 명확하게 인지하며 넘어가 보면 문제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아, 나 지금 내가 저지른 실수로 많이 부끄럽구나. 그럴 수 있지.' 라며 타인에게 말을 하듯 나의 감정을 읽어준다. 읽다 보면 보인다. 수치심에 가려진 진짜 감정은 무엇이고, 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던 날, 폐기 도서를 정리하는 작업 중 함께 일하는 언니가 폐기도서목록을 날려 버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언니 옆에서 같이 한숨을 쉬는 것으로 공감과 위로를 보냈다. 잠시 후 폐기 도서를 서가에 꽂는 나를 발견하고 '등신!' 을 외쳤다. 순간 방금 자신의 실수로 애석하게 앉아 있던 언니가 생각났다. 다시 외쳤다.

"아니야, 나 등신 아니야! 실수 할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언니가 나를 보고 싱긋이 웃으며 지나간다. 나는 나를 구하며 타인도 구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메여 반추로 감정을 축적하다 보면 우울'감'이 '증'으로 병리화 되고 변화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지. 그 실수로 많이 부끄럽구나.'라는 관용의 말을 지속적으로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의식적으로라도 나를 남 대하듯 말 하다보면 언젠가는 습관을 넘어 일상이 될테니까.

24년 나에게 주는 단어

모든 과거는 흘러가고 관계는 순간이지만, 나는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영원의 관계이고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니까. 나는 나와의 사이에 간격을 넓히고 그 사이 바람길을 만들기로 했다.


진심으로 나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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