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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Dec 27. 2023

오래된 나를 만나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오늘은 결국 내일이 된다는 섭리 앞에서.

살얼음 낀 바람이 무람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이기는 계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걷는 두 발의 무게가 가볍다. 지면의 단단함을 느끼며 걷는 길 위에서 괜한 웃음이 터졌다. 루돌프 뺨치게 빨게 진 코를 지체 없이 식어가는 커피에 의지하며 도서관에 닿았을 때, 모처럼 나다워 보인다며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구차한 설명이 싫어 만남을 줄였다. 그럼에도 꼭 나가야 하는 자리에서는 늘 웃는 얼굴로 지냈다.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는 사장님의 자긍심에 일일이 맞장구치며 칭찬해 드렸고, 답답해서 나왔다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함께했다. 소중한 사람과 나의 관계를 언짢은 설 된 말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대신 내 생각만 확고히 전했다. 그런 나를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말했다.


"내가 본 언니는 처음부터 참 밝고 속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그때 식당에서도 그래. 마음이 지옥이었는데 굳이 웃으면서 다 들어주고 칭찬해 주잖아. 게다가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함부로 말하는 사람 앞에서 화 대신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말하는 정도로 선을 긋는 사람은 드물어요."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기분을 분출할 필요는 없어서라는 말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 부분이 언니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에요. 나는 언니의 그런 면이 참 좋아요."


피상적인 친절을 베푸는 속 빈 껍데기 인간이라고 자평했던 나는, 웃는 얼굴 뒤로 속마음을 숨기는 모습도 그 단면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의 말속에 담긴 내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보지 못하니 내가 비춰주겠다'며 작정하고 나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친구에게 또 빚을 졌다.

늘 생각했다.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과연 괜찮을까? 그래서 늘 외모를 신경 쓰고 말 한마디 편히 하지 못했다. 돌아서면 뱉은 말을 복기하며 애써 사과할 지점을 찾았고, 메시지를 보내며 영문 모를 사과를 전하곤 했다. 어느 순간 나의 사과가 상대를 '고작 이런 일도 이해 못 하는 속 좁은 인간'으로 찍어버리는 행동임을 알아차렸을 때, 어려웠지만 더는 반추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편한 감정은 늘 함께 했기에 눈치보기 일쑤였고 의도하지 않은 상대에게도 휘둘리며 살았다.


이제는 생각한다. 누군가를 해하는 일이 아닌 이상 실수는 괜찮은 일이라고. 입이 얼어 아무 말하지 못했던 나도, 무상한 말을 툭 뱉어 다른 사람을 언짢게 하는 나도,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질책하는 대신 벌어진 상황은 책임을 지고, 같은 일은 반복하지 않도록 애쓰는 태도가 중요함을 안다. 그리고 타인에게 환하게 웃어 줄 수 있고, 다정한 마음을 내어 줄 수 있고, 그 모자람에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존재의 나를 생각한다. 수치스러웠던 나의 어린 시절과 아팠던 일련의 시련을 잘 견뎌낸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토닥이면서.

지난밤, 할아버지와 눈싸움을 하며 하루를 보낸 아이들이 밤새 끙끙 대며 뒤척이며 자는 통에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동안 문득 미래에 대한 진진한 고민이 피어올랐다. 대학원을 가지 않으면 무용한 상담심리학의 전문성을 위해 오래도록 석사 학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으므로, 간밤의 고민이 새로운 주제는 아니었다.


달라진 하나가 있다면 고민 앞에서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뜨거운 감자였던 진학에 대해 확고한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확신의 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며 나를 흔들고 있었다. 늦은 밤이면 인간에게는 걱정과 불안이 쏟아진다는 통념을 깬 시간이었다.


나의 존재를 의심 대신 관심으로, 미움 대신 사랑으로 키워가고 있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게 고마워할 수 있도록 오래된 나를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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