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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08. 2023

끊을 수 없는 이야기의 진진함

모순덩어리에게 유감을 표하며

독감 마지막 주자, 남편이 열흘째 앓고 있다. 일주일 내내 잠결에 열체크하며 병간호를 하고 있는데 별 차도가 없어 진료받을 것을 종용하고 있지만 꿈쩍도 않고 침대에 들러붙어 있다. 금요일까지 오르락내리락하던 열이 어젯밤부터는 완전히 꺼진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몸살이 들이닥쳐 끼니때 반짝 일어났다가 누워있기를 반복하고 있다. 매 저녁 집밥은 당연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돌봐주면 나아 볼 노력을 위해 병원에 갈 법도 한데 야속한 남편 같으니라고. 오늘로 건너오는 시간, 나는 글을 쓰는 핑계로 거실에 혼자 남아 있기로 했다.


혼자 티브이를 틀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문득 동네 커뮤니티 내 뜨거운 반응이 쏟아진 넷플릭스 [더 글로리]가 생각났다. 송혜교 님 팬이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벽 2시, 오랜만에 티브이로 넷플릭스를 켜니 리모컨 조작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1화는 왜 오프닝 건너뛰기가 안되는지 구시렁구시렁거리며 [더 글로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원래 계획은 1화만 보고 3시에 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은가. "의지로만 살면 삶이 답답하다." 나는 답답한 삶을 지양하기에 가볍게 계획을 무시하고 2회를 빠르게 틀어냈다. 2화부터는 오프닝 건너뛰기가 가능하니 빨리빨리 볼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되뇌며 말이다. "한 편 만 더!  한 편 만 더!"를 원하던 나는 결국 뜬 눈으로 아침 9시 [더 글로리]의 마지막에 도착하고 말았다.


분명 어제 하루가 무척 피곤하고 졸렸는데, 나를 잠에서 구하고(?) 스토리로 인도한 [더 글로리]의 진진함을 인정한다. 희락이란 감정을 쏙 걸러내고 정재 된 노와 애만 지닌 주인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예쁘다. (무려 송혜교 님이니까요.) 초자아와 에고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양극성 장애가 있는 악의 무리들은 사회적 생존을 위협받자 오로지 살기 위해 파충류의 뇌에서 본능만 끄집어 내 행동하는 것들도 꽤 흥미진진했고.


다만 학교라는, 아이들을 조건 없이 평등하게 보호해야 할 집단 안에서 배경과 조건으로 계급이 나눠지고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당연시되는 허구가 현실과 닮아 있어 먹먹하게 다가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과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데 우리나라의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 수위나 피해자들의 후속처리가 드라마처럼 "싸우면서 크는 거지"로 처리될 때가 많으니까. 아무튼 20년 동안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산 개인의 삶은 마치 돈이란 배후를 등에 업고 법 위에서 굴림하는 인간을 허락한 사회를 단죄하는 구원자의 삶처럼 비친다. 우리의 주인공, 어떤 험난한 일도 없이 복수가 성사되면 좋겠는데, 벌써 고구마 싹이 곳곳에 보여 남은 8회도 다소 퍽퍽할 것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남다른 스토리는 악을 악으로 복수하는 통쾌한 디스토피아로 데리고 가겠지. [더 글로리]의 남은 8회가 무척 기대된다.


날밤을 하얗게 새 버렸으니 쏟아지는 잠을 감당할 재간이 없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꾸벅꾸벅 졸고 있다. 커피는 그저 물일 뿐, 잠은 잠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한편 OTT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면 그만큼 서버의 전기도 많이 필요해서 넷플릭스를 밤새 보는 건 환경오염에 일조하는 거라고 배웠는데. 어제 이상 기후 걱정 실컷 해놓고 날밤 가득 새며 티브이 속에 들어가 버린 나의 모순! 심히 유감스럽다. 아,,,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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