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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Jan 10. 2023

그리는 마법을 배웠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불혹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잘 그리는 사람의 그림을 넋 놓고 보기만 했다. 나는 잘 못 그리니까 밥 로스 아저씨처럼 "참 쉽죠~" 하며 뚝딱뚝딱 그림 그려내는 손을 보며 대리만족 하고 살았다. 내게 "그리다" 동사는 언감생심 평생 쓸 일 없는 동사이기도 했다.


잘 못 그린 그림을 보며 매번 좌절하고 손쓸 수 없는 그림들을 보며 상처받을 유리 같은 내 영혼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손쓸 수 없는 그림은 없어. 실수가 그림이 되니까.

그건 너같이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된다며 웃었다. '나는 사고, 너는 사유'라며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 뒤로 스멀스멀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나. 커져가는 마음을 욱여넣고 무시해 버렸다. 누군가의 손을 넋 놓고 보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실험대상이 필요해. 주변에 그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 없어?


두 번째 기회는 놓치지 말자! 고민도 없이 기꺼이 그녀의 실험대상이 되어주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배운 우쿨렐레 수업을 바로 그만두며 22년의 끝을 맞이했다.


그녀는 수업 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 5장과 그리고 싶은 그림 5장을 찾아오라는 숙제를 줬다. 그녀가 추천한 앱을 깔아 뒤적뒤적 찾아보았다. 단순한 그림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으로, 하늘과 꽃을 담은 풍경은 그리고 싶은 그림으로 담았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고를 땐 마치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고르는 기분이었다.


대망의 첫 수업 날 오늘. 그녀는 나와 동갑내기지만 선생님으로 만나니 존댓말이 절로 나온다. 그녀가 나눠주는 이야기이 소리로 흘려가지 않도록 마음에 한 자 한 자 새겨 들었다. 탁색이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쓸 재료들의 특성, 그림을 그리는 순서 등을 이야기 들려주는 듯 체계적으로 알려주었다. 두 시간 동안 총 4장의 그림을 그렸는데 왠지 참 마음에 안 드는 내 그림.

그래도 버리지 말고 끝까지 그리고 사인을 하고 제목을 쓰라는 그녀의 주문에 포기 없이 끝을 봤다. 털모자를 그려야 했는데 짜임을 그리다 씨가 아주 많이 박힌 딸기가 됐고, 또 털모자를 그리기 위해 밑작업을 하다 타이어를 두른 소녀가 된 그림을 보며 알 수 없는 인생이 보였다. 거창한 계획은 늘 우리를 비웃으며 비켜가지 않던가.


세 장의 그림은 부족함이 이끄는 데로 끌려갔다. 참 마음에 안든다. 체념하는 순간, 그녀가 마지막 그림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잠깐, 내가 이걸 그린다고?' 의문문을 잔뜩 품은 나를 보며 물론 따라 그린다 해도 이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너만의 그림이 탄생한다는 각주를 달아줬다. 잠깐 달뜬 마음 뒤로하고 그녀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그림을 시작했다. 내 속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녀가 말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린 그림에 훨씬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지. 멋대로 그린 그림은 잘 그린 예쁜 그림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매력 넘치는 멋진 그림은 될 수 있어. 그리고 더 감성적일 수 있으니까 일단 그려봐.

언제나 탈규격화를 외치는 내게 이보다 더 큰 격려는 없을 것이다. 완성된 그림은 그녀의 말대로 매력 넘치는 나만의 색감이 뿜어져 나오는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따라 그렸지만 전혀 따라 그린 것 같지 않은 내가 그린 그림 말이다.


두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짐을 챙겨 나왔다. 겸에게 마지막에 그린 풍경 그림을 자랑하려고 그림 노트를 펼쳤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망쳤다고 생각했던 세 장의 그림이 어여쁘게 다가왔다. 분명 한 그루의 이상한 나무를 그렸는데 집에 와서 보니 두 그루의 예쁜 나무가 되었고, 딸기는 싱싱한 딸기처럼 보였고 소녀가 두른 목도리는 더 이상 타이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득 수업 때 그녀가 해 준 이야기가 들려왔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려야 해.
그림과 나 사이 거리가 생길 때
비로소 그림이 객관적으로 보이며
채워야 할 곳과 비워야 할 곳이 보이니까.

그녀는 미술 선생님이 아니라 마술 선생님인가, 인생 선생님인가. 틈을 사랑하지만 만들 줄 몰라 매번 빡빡하고 가득 채운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선생님을 잘 만났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내가 그린 그림을 넋 놓고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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