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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글이 Apr 06. 2023

늦은 때란 없어

나의 속도로 세상을 만들어 갈 뿐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아파트 나이와 함께 나이 먹는 벚나무들이 있다. 30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키며 건강하게 살아온 덕분에 양쯔강의 훈풍이 불어오면 진진한 분홍 꽃을 틔우고 어여쁜 향을 피우며 봄을 알린다. 덕분에 나는 매년 봄이 올쯤이면 기린처럼 목을 빼고 내내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우리 동네 벚꽃길

올해도 어김없이 꽃이 피었다. 바쁜 중에도 아이들과 틈틈이 그 나무들 아래에서 봄의 향기를 누리며 빛이 가득한 날들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날들의 어느 날, 혼자 겨울을 사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무슨 나무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를 보며 나는‘죽은 나무인가?’ 의심의 눈빛을 던지고 집에 들어갔다.

바람이 떨어뜨린 꽃잎들

봄바람은 이내 나무를 흔들어 꽃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떨어진 꽃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벗었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떨어진 꽃들이 아쉬워 바람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밤산책을 즐겼다. 한참 땅을 보며 걷던 내가 다시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혼자 겨울을 살고 있던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가지마다 촘촘히 벚꽃을 틔우며 나무는 자신의 속도로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섣불리 생나무를 잡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근까지 하고 싶은 공부와 일을 두고 회의와 열망이란 양가감정 속에서 울부짖었다. 정말 배우고 싶었다고, 공부가 재미있다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아이들이 너무 방치되는 것 같다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나는 이미 늦었다고, 이제 와 이걸 배우는 건 돈낭비일 뿐이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어깨를 토닥이며 휴학을 권했지만 나의 감정에 해답이 되지 못했다. 하고 싶은데 그만하고 싶은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이 버거워지기 시작하자 나는 누군가 어떤 결론을 내려주길 바라게 되었다.


다시 삶에 대해 방어적 태세를 갖추고 수동적인 마음으로 움츠려 들 때 즘 SNS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만 56세의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이기적인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글이 담긴 사진이었다. 갑자기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내 마음에 쿵 내려앉았다. 꽃을 피우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시작을 선택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시작이 반이고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마음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속도로 봄을 맞이한 나무를 기억하며. drawing by sy

느지막이 달콤한 벚꽃을 뽐내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작은 나무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꽃을 틔웠고, 마치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에 다시 봄을 선포했다. 어린 벚나무가 이뤄낸 봄을 누리며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본다. 나는 남들과 다른 나의 속도를 늦은 속도로 오인하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며 살았었나. 세상과 타인을 기준으로 압박하던 나를 이제는 내보내야겠다. 마음 가득 채운 삶의 회의를 비워내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과 가진 것들에 대한 사랑을 채워 놓아야지. 언젠가 선포하게 될 나의 봄엔 틔운 꽃들로 인해 기쁨이 넘쳐흐르수 있도록 나의 지금을 살아야겠다. 나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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