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화가 났다. 무용(無用)한 회의를 계속하는 팀장한테서. 팀장은 팀의 성과가 아닌 조직의 발전이 아닌, 자신의 성과가 더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이미 정해진 정답에 화려한 포장과 덧칠을 해 댄 문건을 계속 만들어 보라며 혼자 같은 말을 반복하는 회의 아닌 회의를 했다.
가슴 깊숙이에서 올라오는 답답하고 뜨거운 증기를 겨우 삼켜 가라 앉혔지만 다시 시간이 흐를수록 뜨거운 증기는 화염이 되어 스멀스멀 목까지 차올라 왔다.
'과장님, 회의 많이 하면 공산당이래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소리를 치고 속 시원하게 박차고 일어나는 내 모습을 상상했지만 이내 수습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내가 찾아와 나를 한대 갈기고 조용히 자리에 눌려 앉혔다. 찰나에 여러 미래 모습들이 다투며 현재 자리에 나를 조용히 머물게 했다
가까스로 회의 끝내고 내자리로 돌아와 접신한 듯 본연의 업무를 쳐내고 있을 때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감이가 머리 아프대요. 엄마가 빨리 왔으면 좋겠대요'
으레 자주 머리 아프다는 말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주도해 간 적이 있어' 꾀병이겠지' 하다가 그래도 걱정돼서 인터넷으로 폭풍 검색을 하니 아이에게 꾀병은 없다는 것이다. 설사 정말 신체적 문제가 없더라도 심리적 결핍이나 불편감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뭣이 중하냐! 일은 주말에 하던가 하자'하고 팀장님에게 조퇴를 보고했다. 조금 전 장시간 회의 후 가만히 결과물을 기다리고 있던 팀장의 눈빛에 일순간 서운함과 실망감이 비쳤다.
그러나 애써 억지미소 뒤로 감추며 "가 봐. 아이가 코로나는 아니겠지"라고 한다.
그 말이 '계획서가 늦어지면 안 되는데'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안과를 갔다. 안과 후 소아과와 이비인후과를 가볼 예정이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거나 비염이 심할 경우 두통이 올 수 있다는 글을 본 후였다.
안과 진료가 6시 마감이었데 겨우 도착하니 5시 50분이었다. 병원에 입장한 나를 보고 퇴근 준비하던 간호사와 의사가 흠칫 놀라며 다시 조용히 자리로 가 앉는다. 나도 순간 미안함으로 머쓱했지만 이내 화가 났다.
"머리가 아프다면 소아과나 이비인후과를 갈 일이지 왜 안과를 와요!"
"어지러울 정도로 시력이 떨어져 있지 않아요"
이상하게 혼나는 듯한 느낌의 딱 두 마디를 듣고 진료비 4,500원을 내니 화가 치민다. 공짜도 아니고 나도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건데. 병원은 이상하게도 환자에게 돈을 받지만 항상 불친절한 갑이다.
이비인후과를 갔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놀랐다. 하지만 여기는 진료 마감이 7시. 1시간 이나 남아 안도했지만 이내 피로감에 지쳐 보이는 간호사들이 수근수근 논의하더니 딱딱한 말투로 접수를 거부했다.
'보시다시피 사람이 많아서요. 접수하실 수 없어요'
바쁜 와중에 조퇴까지 감행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아이는 유치원 끝나고 가는 피아노 학원에 못 갔다며 징징거렸다. '언제는 빨리 와달라며!' 변덕스러운 장단에 맞춰 줄 에너지가 없었고 나는 방전되었다.
또 여러 번에 걸친 불화통은 화딱지가 되어 마음속 깊이 내려앉았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왜 이렇게 화가 많아! 너무 쉽게 화를 내!'라고 했다. 답답해진 나는 동생에게 하소연을 했다. 가만히 듣던 동생이 하는 말.
"언니가 여유가 없네"
순간 오늘 하루의 필름이 거꾸로 돌아갔다. 회의를 참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팀원도 다 감내하며 무덤덤했었다. 병원에서 그 오랜 진료를 기다리고 앉아있던 환자들도. 내 뒤에 이어 온 진료를 거부당한 아주머니도 다들 그러려니 했었던 것이다.
나는 시간이 없다. 여유 있게 일하다 다 못하면 초과근무를 할 시간이 없다.
퇴근 후에는 어떤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아이를 재우고 난 후 밤 10시부터 시작이다. 그 시간마저 하루의 고단함으로 아이를 재우다 잠들어 버리면 하루에 내 시간은 통으로 사라진다.
시간이 없을 뿐인데 마음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까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나는 자주 화가 치민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게 되었다.
'나 지금 여유가 없구나.'라고.
소소하게 부딪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남들보다 화가 더 많다고 느낀다면 마음을 들여다 보자.
내 마음이 지금 쫓기고 있는지. 그래서 타인을 이해해 줄 여유가 없는지. 그리고 화내기 전 내 마음부터 보듬어 안아 주자.
'나 많이 힘들구나'라고. 토닥토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