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8일 에세이
20살 때의 일이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왜?"
"같이 염색이나 하자"
"그래 알았어 그런데 무슨 색으로 하게?"
빨간색!
고등학교 3학년 때 짝꿍의 전화였다. 대학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는 늘 관심이 없어하던 친구였지만, 돌연 마음이 바뀌어 경기도의 한 전문대학교로 올라온 친구였다. 본의 아니게 타지에서 올라와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다 보니 편하게 집을 오가면서 만나곤 했다.
해가 질 무렵 난 친구의 집으로 갔다. 농담인 줄 알았으나, 친구는 정말 빨간색 염색약을 사 가지고 왔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고 해도 너무 강렬한 색이었다. 결국, 나는 염색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친구만 해주기로 했다.
친구는 다음날 대학교에서 축구대회가 있어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빨간색으로 염색하고 싶다고 그 연유를 설명했다. 처음 생각과 달리 그 말을 들으니 조금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염색약을 발라주고, 배가 고프길래 라면을 끓였다. 라면만 먹기에는 적적하여, 혼자서 소주도 한 잔 기울였다. 친구는 염색이 강렬하게 되길 바라면서 매우 오랜 시간 티브이를 보았고, 나는 배가 부른 탓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일어나 이 XXX야!
경황이 없어서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으나 자정을 넘긴 것 같았다. 친구는 자고 있던 나의 멱살을 잡고 다짜고짜 욕을 해댔다. 잠에서 깬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물었더니 친구가 울상이 되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친구는 내가 자고 있을 때 염색이 다 되었을 것 같아서 머리를 감았다고 한다. 그런데 웬 걸 두피만 염색이 되고, 머리는 그냥 그대로 검은색이었다고 한다. 이상한 생각에 다시 염색약을 보니 같이 섞어서 썼어야 하는 한 봉지가 나왔다고 한다. 그 약을 빼놓는 바람에 내 친구는 머리색이 빨간 사람이 아닌 머리가 빨간 사람이 됐다.
더욱 큰 문제는 내 친구는 머리숱이 많지도 않은 데다가 짧은 머리여서 두피 색이 그대로 다 보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등학교 때 그 친구 별명은 대머리였다) 게다가 장난을 친다고 귀에도 염색약을 칠해준 나는 몇 시간 후 그런 엄청난 결과가 펼쳐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이후 친구는 어떻게든 머리를 되돌리고 싶어서 때수건으로 머리와 귀를 문질렀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피부가 더 빨갛게 되는 바람에 친구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친구가 자고 있던 나의 멱살을 잡았던 것이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미용실에 가서 우린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아침 7시에 문을 연 미용실은 없었다. 9시 축구대회까지 우리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친구는 머리 위에 비니를 쓰고, 대학교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여유 있게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줄 알았으나, 다시 저녁때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 때문에 다 망쳤어! 주목받기는 커녕 개망신만 당했다고!"
무슨 말인지 물으니 친구가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수비수를 보는 내 친구는 그 날 아침 비니를 쓰고 간 채로 축구대회에 나갔는데, 상대편 선수와 헤딩 경합을 벌이면서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잠시 기절을 했다고 한다. 경기에 같이 뛴 선배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부축해주러 가까이 왔고, 살짝 벗겨진 비니 사이로 비친 친구의 두피가 다 빨간색이니 머리가 크게 다친 걸로 오해했다고 한다. 친구가 기절해 있는 사이 빨리 구급차를 부르라고 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친구가 설명을 해주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 저녁때 술자리에 오라고 했지만, 너무 자존심도 상하고 창피했던 친구는 그 길로 집에 와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때로는 순간의 실수가 한 사람에게 영원한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