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심리 상담
3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지니, 결국 신경정신과도 내원해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 밥은 끼니를 거르는 게 일상이 됐다. 어쩌다 한 번 대충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는 밥은 참을 수 없는 허기짐이 올 때만 먹었다.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일주일이 흘러 두 번째 심리 상담 시간이 찾아왔다. 첫 번째 심리 상담은 선생님도 내가 왜 찾아온 지를 모르기 때문에 한 달 전의 연애에 대해서 설명을 하다가 시간이 모두 갔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이 도래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저번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볼까요?
제가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친구가 회피형 혹은 공포-회피형이라고 했을 때 제가 불안형이 맞았던 것 같아요.
불안형은 대체로 자존감이 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과거를 돌이켜보니 실제로 저는 자존감이 낮았던 것 같아요. 늘 아니라고 믿고 있었지만, 잘 사는 사람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나는 경쟁을 즐기고 거기서 이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점점 밀려났죠. 서울에 와서는 더더욱 그랬어요. 시골에서는 그런 격차들이 피부로 많이 와닿지 않지만, 서울에서는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좌절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욕심과 현실의 괴리가 있었던 점이 늘 불만족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했지만 그건 실제로 그렇게 느껴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자기 합리화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듣고 상담사 선생님이 말씀을 주셨다.
"그랬구나~ 그럼 혹시 과거 이야기 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제 과거사는 저의 외로움과 관련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17살 때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그때부터 사실상 본가를 떠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20살 때는 서울에 왔고, 아직도 서울에 살고 있으니, 약 2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집을 떠나 있었네요. 그리고 제 인생에 반 이상은 저 혼자였죠.
친구는 많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물론 그것도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싶고, 같이 놀고 싶었기 때문이겠죠. 연애는 더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힘들고 외로운 제가 연애를 할 때만큼은 기분이 좋고 설렜어요.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점과 물리적으로 옆에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위안이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연인과의 다툼에서는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하게 찾은 내 안정감을 없애는 일이니까요. 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있다가 없는 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죠. 정신적, 육체적인 만족감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걸 용인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랬군요. 많이 외로웠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많이 다투셨어요. 제가 4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집은 시장통에 있는 가게 뒤 단칸방에 살았어요. 그게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렇게 좋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도박(화투)을 하셨어요. 가뜩이나 없는 형편에 도박이라니.. 결과는 뻔했죠.
화난 엄마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아버지는 피했어요. 그러다 보니 갈등은 더 깊어졌고, 몸싸움도 일어나고, 집 물건이 파손되는 일도 빈번했죠. 저는 동생과 같이 방에서 움츠려 있는 일이 많았어요.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도박을 말리려고 잡으러 다니는 우리 엄마와 어떻게 해서든 도박을 하려는 저의 아버지. 그게 제 현실이었죠.
그런 상황이 거듭되다 보니 제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농약을 마시려고 했어요. 저는 달려가서 그 통을 치웠죠. 그래서 다행히 그게 입에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살면서도 고등학생이 될 때는 택시기사를 했던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갖게 되고, 우리는 드디어 우리 가족의 집을 갖게 됐어요. 그게 끝일 줄 알았어요. 그간의 어려움이 끝나는 시점일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