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 4명과의 송년회
"오래간만에 송년회 겸해서 얼굴이나 보자"
2023년 12월. 나와 고등학교 친구들 3명은 약속을 잡았다.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가끔 얼굴을 봐 온 사이다. 친구 A와 B는 같은 증권사를 다니지만, 한 명은 회계사(A)이고, 다른 한 명은 펀드매니저(B)다. C는 대학병원에서 행정직을 하고 있다.
6시가 되자 약속장소인 여의도의 한 고깃집에서 3명이 모였다. C는 야근 때문에 올 수 없었다. 나머지 친구들은 반갑게 인사하고,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곧 40대가 되는 우리의 대화 주제는 '건강'이었다.
B는 최근 들어 이상해진 몸상태 때문에 다음 날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간다고 했고, A는 얼마 전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신 장인어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오래간만에 만난 송년회인데 주제가 무거웠다. 그렇지만, 싫진 않았다.
A, B, C는 모두 결혼했고, 그중 A와 B는 자녀가 있다. 나는 결혼하지 못했다. 각자의 몸상태도 살펴야 하는 나이가 됐지만, 챙겨야 할 어른 또는 자녀들을 예의 주시해야 되는 때가 됐다. 결국, 우리들에게 건강 이야기는 무겁다고 기피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일 이야기, 가족 이야기, 자녀 이야기, 연봉에 관한 이야기, 직장인의 삶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얼마 되지 않아 B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자녀가 아팠기 때문이다. 결국 A만 나와 2차를 갈 수 있었다.
오붓하게 둘이서 소주 한잔을 기울였다. 여의도의 고층에 위치한 황태집이었다. 내부 의자와 테이블들은 황태를 파는 집에 걸맞게 나무색을 띠고 있었다. 듬성듬성 자리에 앉은 아저씨들이 각 자리마다 소주 한 병씩을 먹는 장면은 구수한 정취를 보였지만,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깔끔하고 도회적인 서울의 밤 풍경만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B는 평소 돈을 많이 아낀다고 했다. 그러다 컴퓨터 방을 최근에 꾸몄는데, 그렇게 행복했다고 한다. 어떻게 바꿀지, 뭘 사서 바꿀지를 생각하며 너무 즐거웠다는 이야기를 들렸줬다. B는 나와 초, 중, 고를 함께 보낸 친구다. 당시만 해도 우리가 나이를 먹고, 서울에서 같이 소주 한 잔 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다만, 이렇게 서로 일상에 치여 살 것이라고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1시간가량 대화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가게를 나서면서 나는 B에게 말했다. "지하철 역으로 갈 거지?"
그러자 B는 답했다. "팀원들이 일하고 있어서 들어가서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아"
B는 약속이 끝나고 집을 가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시간을 내준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회사로 가는 친구의 뒷모습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냥 일상이다. 슬퍼할 것도, 즐거워할 일도 아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12월에는 늘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한 해를 잘 보내서'라는 이유로, 또는 '새로운 것이 막 다가올 것 같은 한 해가 있어서'(막상 별다른 게 없지만...)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느낌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다. 거리에서는 캐럴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네 삶을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보다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1년을 애썼구나.'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될 말은 하고 싶다. 올해를 열심히 살아온 모두들 고생이 많았고, 내년에는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