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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욱 Mar 26. 2024

즐거운 계절

 겨울에 일어난 모든 일이 있기 전에 가을이 있었다. 가을이 지나간 자리마다 나무들은 앙상해졌다. 새하얀 눈은 언제 다 내렸나. 눈은 가을이 남긴 유서같다. 때로 하얗고 때로 쌓여있었고 때로 젖어있었다. 겨울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흐릿한 즐거움.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눈이 춤을 추고 각진 바람이 분다. 슬플만큼 춥다. 이 추위는 물을 얼음으로 만들 수 있다. 물이 얼음이 될 때 추위는 어디를 가는 것일까.      


 지난 계절에 나는 눈을 들여다보며 줄거리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생각하다가 서로를 믿다가 결국에는 서로의 종교가 되어 서로를 순례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행인이 되어 끝없는 골목길을 걷는. 그러다 어느 이름없는 서점에 들러 성서를 하나 집어드는. 그런 순례가 즐거움이 되는. 그 골목길마다 눈이 쌓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울리는 성서를 새로 써야만 하는 것이 사람의 일. 우리는 같은 나라의 말을 쓰면서 왜 다른 혼령의 말을 할까.

      

 삶을 이해하기에는 어리고 이해한 대로 살기에는 늙으므로 가까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는 일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끝에 가까스로 닿을만한 무언가처럼 아득하기만 하고, 무언가의 흔적을 기억한 채 손끝과 손끝을 서로 마주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된다. 이 모든 일들은 겨울이 지나기 전에 마무리해야만 한다,고 기도한다. 이것이 지나가는 계절을 바라보는 흐릿한 즐거움일까.  

   

 가을에 나는 항상 겨울보다 어렸다. 손끝과 손끝을 서로 마주하게 하는 추위. 겨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이 된 얼음들이 흐를 것이다. 기도가 계절을 바꾸는 것일까 계절이 기도를 바꾸는 것일까. 흐릿한 결론들.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즐거움이 눈이 되어 내린다. 오늘은 겨울. 즐거운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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