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프러스 나무에게 배운 것

by 에세이가주

우리 동네에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많다. 야자수가 있는 다른 동네와는 다르게 집 앞에는 늘 하늘로 솟은 싸이프러스 나무를 볼 수 있다. 싸이프러스는 키가 큰 상록수이다. 다른 낙엽수들이 잎을 떨구는 겨울에도 변함없이 언제나 푸른잎을 달고 있다. 다른 나무들보다 키가 훨씬 크지만 흔들림없이 항상 곧게 서 있다.한여름에 나무를 올려다보면 태양빛을 받아 이글이글거리는 것처럼 활기차 보인다. 얼마 전 비바람이 세게 치는 날이 있었다. 바람이 얇은 창문을 쿵쿵 때리고 바람 소리가 심상치않다고 느꼈던 아침 아들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 집 앞의 싸이프러스 나무가 기울어진 것이 보였다. 키가 큰 나무라 조금만 기울어져도 휘청거릴만큼 위태로워보였다.


‘너도 간밤에 힘들었구나.’


집 앞을 지날때마다 휘어진 나무를 보니 마음이 쓰였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그즈음 나는 겉으로는 고요했지만 마음은 붉으락푸르락 거렸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버릴 사소한 문제에도 발끈하게 되는,불안하고도 우울한 마음이 며칠 계속 되었다. 신경이 날카로워 누가 툭 건드리면 바로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누군가가 스탑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살아왔던 모든 삶도 멈춰버린다. 다시 힘을 내어 나가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의 몸과 생각이 다시 유연해지는 시간은 오래 걸린다. 내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잘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도 사그라든다. 마음이 왜 이럴까.나는 왜 바보같을까.왜 굳건하지 못할까.용기내지 못할까.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가족들이 모두 새로운 길을 찾아 미국으로 왔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안정된 삶을 위해 노력했지만 남편과 매일 싸우기 바빴다. 처음에는 두려움보다는 설레임이 앞섰다. 새로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일인지 와서 살기 전까지는 잘 몰랐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언어에 적응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도 영어가 자유롭지 않으니 더 위축이 되었다. 아이 학교 선생님과 상담하는 일,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보는 일, 싱크대 하수구가 막혀 수리하는 일, 전기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와 알아보는 일 등. 한국에서는 대소롭지 않게 처리했을 문제들이 모두 다 스트레스였다. 가족 모두 각자의 스트레스들을 안고 지내는 하루하루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하루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이 먼 나라까지 와서 고생이야’ 하는 마음은 남편에게 원망의 마음으로 돌아갔고 매일 마음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갈피를 못 잡고 어지러운 채 시간이 지나갔다. 이 나이쯤 되면 다들 안정된 삶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은 남과 비교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왜 나는 아직 이모양이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안으로 숨기 바빴다. 울퉁불퉁한 마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니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였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않은 나의 못난 마음이 보였다.


‘나는 지금 많이 흔들리며 힘들구나.’ 비바람에 흔들려 기울어진 싸이프러스 나무를 보며 나를 보았다. 내 마음이 딱 저렇게 기우뚱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힘든게 당연하지.괜찮아.’

힘든 나를 이해하며 인정하고나니 경직되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꼭 잘 살아야겠다’는 한국을 떠나기 전의 비장한 마음은 지금은 없다. 그때 가졌던 막연한 희망의 마음도. 앞으로는 지금보다 덜 흔들리겠다는 굳은 다짐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비바람에 나를 맡기고 흔들리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너무 꼿꼿하게 서 있다가는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경직되어 있지 않고 유연한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있는그대로 보며 인정하기로 했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화가 반 고흐가 즐겨 그리던 나무였다. 그가 생 레미 요양소에 있을 때 매일 병원 밖에 나가 그리던 것이 보리밭과 싸이프러스라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잔잔해보이는 나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거친 바람이 부는 순간 격렬하게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흐의 마음같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푸른 싸이프러스 나무를 그리며 고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다보면 가슴이 쿵 하며 어디론가 혼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때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다. 나는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자책도 하고,지난 세월 후회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면 나만 더 초라해질 뿐이다. 그럴때마다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 힘을 낸 것은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않다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서 한동안 의욕이 없다가도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리운 날이 오면 다시 불끈 용기가 생기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마음, 옆에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싸이프러스 나무가 고흐에게는 위안과 희망의 상징이였으리라.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하는 마음은 때로는 위안이 된다. 삶은 원래 그런거라고,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사는 거라고 하는 말도.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 생각하고 인정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 마음만 바꾸면 되니까. 미워하는 마음도,원망스러운 마음도 옅어졌다.


매번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때로는 힘을 빼며 사는 것도 필요하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매일 꾸준히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으로 다시 힘을 얻는다. 오늘은 햇볕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싸이프러스의 푸르름을 본다. 비와 바람에 흔들거렸던 나무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다시 하늘로 솟아 진한 초록빛을 내고 있다. 사이프러스를 보며 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니라며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야’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을 고흐가 보인다. 고흐의 싸이프러스 나무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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