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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가주 Dec 17. 2020

오후 세 시의 그녀

성큼성큼 용감하게

                                                                                                                                                                                                                                                                                                                                                    오후  시쯤에 산에 오를 때면 보게 되는 그녀가 있다. 날씬하고 키도  그녀는 혼자 산에 오른다. 걸음걸이도 야무져서  성큼성큼 빠른 속도로  앞을 휘리릭 지나간다.  거의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오르기 때문에 산에 오르는 속도가 더디다. 10월에만 서너 번쯤 그녀를 만났다.  짐작으론 매일 오후 세시쯤 집을 나와 산으로 향하는  같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녀의 뒷모습을  때마다 '나도 혼자 산에 오른다면...' 하는 상상을 한다.



지금 계절의 오후 세 시면 거실 한쪽으로 빛이 비스듬히 들어올 때이다. 적당히 한가롭고 노곤해질 시간.


집에 있으면 꾸벅 졸고 있기도 하고 환하게 비추는 거실 바닥 위의 먼지가 심난해 괜히 부직포 청소대를 들고 왔다 갔다 할 시간이다. 올해 일곱 살인 아들이 유치원을 그만두면서 자유시간을 잃어버린 나는 그녀를 보고 마음을 먹었다.


오후 세시의 혼자 있음을 즐기자고.


11월의 첫 주부터 아들은 분주해졌다. 월, 목은 피아노 레슨  화요일은 축구, 수요일은 미술을. 거의 똑같은 시간 오후 세 시면 나는 자유 부인이 된다. 수요일 일이 있는 날을 빼면 일주일 중에 3번은 나도 홀로 산에 오르는 여자가 된 것이다.


오늘이 그 첫째 날. 아들을 축구 차량에 태우고 발걸음을 산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왜 이리 바람이 매서운지, 얇은 패딩을 입고 산으로 들어가는 마음이 스산하다. 휴대폰의 헬스 앱을 켜니 운동을 시작하는 알람이 울린다. 이제 시작.


숲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은행나무숲이 나온다. 등산객들이 떨어진 은행잎을 배경 삼아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걸어가는 내 그림자와 은행잎을 하나로 담아본다. 햇살이 내리쬐는 은행나무숲을 걸으니 금방 마음이 노곤해진다.


                                                


사진을 찍느라 산에 오르는 것에 소홀해지면 안되지 하며 마음을 다 잡고 씩씩하게 앞으로만 향한다. 하나 둘 보이던 등산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 바람 소리, 내가 밟는 낙엽의 바스락 거림만 귀에 들어온다. 캬 하며 하늘 한번 쳐다보고 가을 숲을 감상하며 홀로의 산행을 즐기던 내 마음은 점점 사그라들고, 혼자 아무도 없는 숲길을 올라가는 내 마음은 점점 쪼그라든다. 뒤에서 누가 성큼성큼 올라오는 소리에도 나도 모르게 무서워진다.


헉헉 거리며 올라가는 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 조금씩 안간힘을 쓰며 내려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혼자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이 힘이 들어 보인다. 그분을 지나쳐 올라가니 바람이 더 쌩하니 분다.


귓불과 손끝이 바람 때문에 아려진다.


아무도 없다.


오늘은 약수터까지가 목표였는데 나의 야심 찬 세시의 산책길은 30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혼자 올라가다 재빠르게 유턴하고 씩씩하게 내려오는 나의 모습이 웃겨 혼자 속으로 킥킥 웃는다.


내려가다 보니 아까 올라올 때 마주친 그분을 다시 만났다. 아마 내려가는 건 올라갈 때보다 더 힘드리라.


그분 앞을 성큼성큼 앞질러 내려가는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최대한 나도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이번에는 거의 만삭의 임산부.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걸까. 음악을 들으며 한 손엔 배를 만지고 느린 속도로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점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자 나는 속으로 후회한다.


조금만 더 올라갈걸.


후회를 하고 있는 찰나 오후 세시의 그녀가 내 앞을 쌩하니 스치며 내려간다.

발걸음도 가볍게 여전히 야무진 걸음걸이로.

우물쭈물 산에 올랐던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혼자 산에 오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
산에 가려고 마음먹는 일과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서는 일과
조금 힘들더라도 계속 앞으로 향하는  일
모두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 느리더라도 자기만의 속도로 방향으로 길을 찾아 나서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참 예뻐 보였던 날.

(나도 예뻐 보였을까? ㅎㅎ)



오후 세시의 그녀처럼 당분간 난 성큼성큼 산을 오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이제 곧 사라질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사진 속에, 머리에 담느라


자주 걸음을 멈출 테니까.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간이 흐르면 조금 더 용기가 생길까.


나도 누군가에겐 오후 세 시의 그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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