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집짓기
‘엄마의 집짓기’의 주인공은 부모님이었다. 주도적으로 집 짓기를 이끌어가는 엄마와 그 옆에 항상 함께하는 엄마 꿈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끝없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아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썼다. 그러다 문득, 나의 이야기도 쓰고 싶어졌다. 천안집이 어떤 의미인지, 도시를 벗어난 삶은 어땠는지 말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도시토끼'라는 별명에 대한 소개로 하고 싶다.
초등학교 때 네이버 아이디를 처음 만들면서 '도시토끼'라는 별명을 스스로 붙여줬다. 누군가에게는 신박한 별명이겠지만, 그냥 임의로 만든 이름이었다. 대학생이 되고 약간 부끄럽긴 했지만, 그 시절 내가 귀여워서 변경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리고 교육 봉사를 가서 만난 아이들이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열어둔 화면을 보고, "선생님 도시토끼예요?" 하면서 한 달 내내 칠판에 토끼 그림을 그려놓으면서 이 별명이 좋아졌다.
사실 도시토끼보다는 서울토끼라는 말이 더 맞다. 서울만이 온 세상이었고, 시골이라고 하면 명절에서야 찾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댁 정도만 떠올랐다. 약간 곰팡이 냄새가 나는 옛날 이불, 각종 잡동사니들, 아파트와 달리 창고도 있고 다락도 있는 집 구조는 신기했지만 불편했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벌레만 보면 질색을 했는데, 시골에 내려가면 파리가 앉은 음식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까탈을 부렸다. 이런 나를 큰엄마들은 서울깍쟁이라고 놀리고는 했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님이 천안 광덕산에 주말농장을 만들겠다는 거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귀농, 귀촌의 시작점이 될 거라고 했다.
천안집의 첫인상은 휑하고 텅 빈 공터였다. 아무것도 없는 동네, 그냥 커다란 땅을 사놓고 무척 좋아하는 아빠가 신기했다. 게다가 처음 방문한 날은 좀 추웠다. 시린 바람을 맞으며, 풍경 구경은 그만하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금 뒤 집을 짓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흥미롭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건축은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공터 위에 시간이 흘러 15평짜리 작은 집이 지어졌다. 그곳에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자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예쁜, 벌레가 조금 덜 있는 시골일 뿐이었다. 게다가 한창 공부와 사춘기로 공사다망할 때라, 시간이 나는 날도 적었다. 어쩌다 방문하면 손님처럼 티비를 보며 시간을 죽이다 오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던 공간은 확실히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에어컨과 난로를 들여다 놓으면서 적정 수준의 온도가 맞춰졌고, 대학생이 되면서 친구들과 리틀포레스트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즐거운 공간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시골토끼라는 인스타 부계정을 파서, 소소한 일상들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 공간에 대해 사유하고, 즐기게 된 건 부모님의 퇴직 이후인 것 같다.
신축 건축으로 고군분투하는 두 분을 곁에서 보면서, 구축처럼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들을 매일, 매주 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새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방문할 때마다 자재들이 하나씩 올라가고, 현장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걸 보며 우리 가족의 역사에 중요한 특별한 순간을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구축처럼 어른들의 일이라고, 사진 몇 장도 남기지 않고 흘려보내기 싫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기록하자! 마음을 먹었다. 이 기록의 여정은 ‘엄마의 집짓기’ 시리즈에 담아두었다.
서울토끼로 20년을 훌쩍 넘게 살고 있는 지금, 이제는 시골토끼의 정체성이 생기고, 삶에서 바쁜 도시생활 대신 자연 속 쉼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 살이가 지치면 자연이, 시골이 떠오르게 되었다.
요즘 나에게 광덕산은 일과 일상의 지루함을 잊을 수 있는 짧은 도피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채워지는 ‘진짜 쉼’이 있는 곳이다. 정말 좋은 건 공짜로 주어진다는 말, 이 말이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일상과 드문드문 있는 도파민 폭발하는 자극적인 이벤트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천안집에 내려가 새소리, 풀소리, 깨끗하고 물기와 열기를 머금은 공기, 해 지고 뜨는 풍경을 보면 삶에서 중요한 걸 되찾은 느낌이 든다.
부모님이 이 글을 보면 무슨 시골토끼냐며 비웃을 만큼 (아주 잘 챙겨보시는 구독자이자, 거의 유일한 후원자이시다) 자연 속에서 흙 묻혀가며 일하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그래도 그냥 공간이 주는 안락함과 여유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공간을 자연으로 확장하고, 정말 귀한 것이 뭔지 알게 해 준 이 경험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언젠가는 나도 도시를 떠나 광덕산의 풍경 속으로, 자연으로 녹아들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 그때는 상징적으로 네이버 아이디를 시골토끼로 변경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