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머무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살인을 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살인은 눈부신 햇살 뒤에 붙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문장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당시에 ‘그냥, 살인했어요.’라는 뻔뻔스러운 말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신의 은총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같은 지중해의 햇살을 경험하니, 이런 황홀한 햇살이라면 햇살 때문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이 한창 무르익은 12월에 떠난 스페인 여행, 거기서 마주한 햇살과 한겨울에도 노랑을 뿜어내는 오렌지 나무가 지중해의 첫인상이었다. 이런 신비로울 정도로 따사로운 태양 빛이라니, 삶이 노란빛으로 긍정적으로 물드는 느낌이 절로 났다.
여행의 순서와 상관없이, 가장 기억에 남는 세비아에 대한 소개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유명한 작곡가의 단골집이었다는 카페 옆, 골목 깊이 들어가야 있는 숙소의 첫인상은 좁은 벽 사이 커다란 나무 문이 전부였다. 전쟁이 잦아 문 안에 거대한 성과 광장, 대저택을 숨겨놓은 옛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톨레도에서 작은 저택의 대문 같지만 사실은 성의 광장으로 통했던 문을 본 뒤였고, 여유를 가지고 체크인 시간을 기다렸다.
낮 12시, 커피를 마시고 카페를 나오면서 “copy?”라는 말이 식후 커피에 대한 제안이 아니라 영수증을 원하냐는 말인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여행 4일째 되는 날이었다. 마드리드의 한 식당에서 식후 커피를 무전취식해 버렸다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을 때, 대문이 열리고 청소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들어간 집은 삽화와 소설들로 간접 체험하며 상상했던 대귀족의 저택 같았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의 그림이 걸려있고, 장작으로 불을 지필 수 있는 난로가 거실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창밖으로는 초록 담쟁이로 덮인 벽과 파란 수영장이 보였다. 동그랗게 뱅글뱅글 돌아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서 도착한 3층이 우리가 묵을 방이었다.
유럽 여행을 하며, 옛날 사람들이 만든 건물과 이야기들이 보존되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연결과 연속성의 힘을 느꼈다. 이 저택의 주인 할머니도 오랜 시간 누군가가 사용해 온 집을 이어받았을 것이었다. 이 땅에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이 살았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부럽고 좋아 보였다.
세비아 안달루시아 지방의 풍경을 보며 여러 번 감탄사를 내벧고, 호화롭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알폰소 호텔로 이동했다. 커피맛이 끝내주고, 중정과 중정을 둘러싼 안락 하면서도 멋스러운 카페테리아가 인상적이었다. 일주일에 세네 번은 자발적으로 또는 분위기에 휩쓸려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는데, 여행 중이라는 특별함과 시간의 흔적이 가득한 호텔이 커피맛을 더 깊게 음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고,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소품샵을 둘러본 뒤 시간에 맞춰 플라멩코 공연장에 도착했다. 몸선이 예쁜 댄서가 기쁜 표정으로 추는 춤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중년의 여인이 분노하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비장함이 느껴지는 강한 몸동작으로 한발 한발 내리찍는 모습은 이색적이었다. 뒤이어 남성 댄서분의 춤이 이어졌다. 단호하고 찍어 누르는 듯한 동작과 고개를 흔들 때마다 뺨을 때리고 얼굴에 붙기도 하는 머리카락들이 주는 이미지가 각인되듯 남았다.
공연이 끝난 뒤 집시들이 추던 춤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저항하듯이, 현실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덮어둔 열정을 터트리 듯한 춤의 탄생 맥락을 알게 되니, 더 자유롭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저녁 만찬을 먹으려고 일정의 마지막에 넣어 둔 맛집을 찾아갔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문을 닫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행히 숙소로 가는 길에 줄 서서 구매하는 현지인 맛집을 운명처럼 만나서 피자를 사고, 세비아의 지역 맥주를 곁들이며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 길에 배고픔도 잠시, 세비아 안달루시아 지방의 밤은 너무 예뻤고 충만한 하루가 주는 뿌듯함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