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도 높은 사람에게 필요한 지지 Ⅰ
인생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결국엔 늙어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은 따뜻한 사람하고 하거라.
- 영화 <About time (2013)> 중 -
20대 중반에 결혼하고 싶었던 나는 일찍이 배우자의 조건 3가지를 세워두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생애 첫 연애를 시작으로
30대에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까지
수많은 사랑, 연애, 결혼과 관련된 책을 읽고 직접 경험하며 시행착오 끝에 ‘나에게 맞는 동반자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끌려 만남을 이어갔어도 연락을 자주 안 하거나 정기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
연락을 주고받거나 자주 만났어도 자꾸 조바심 나게 하는 사람에게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부모님의 재력과 본인의 직업에 대해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은
정작 자존감이 낮아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극복하기 어려워함을 자주 보았다.
나의 아빠는 시골의 조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도움 일절 없이 자수성가해
장남으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일찍이 돈의 중요함을 깨닫고
시댁의 도움은 못 받더라도,
최소한 우리 부부의 도움 없이 노후를 보내실 수 있는 정도에 시부모님의 경제력을 원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의 조건에 맞는 호감 가는 상대, 존경심이 생기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26살에 결혼은 훌쩍 지나갔다.
31살 5월,
퇴근 후 회사 앞 퓨전 레스토랑에서 어른들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
남자는 먼저 도착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얼핏 보아도 마른 체형이었기에 근육질의 남성을 좋아했던 난 첫인상에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내 배우자의 두 번째 조건, ‘자존심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더 만났고 만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무렵,
남자로부터 ‘결혼을 전제로 한 정식 교제’를 제안받았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여전히 이성적인 끌림이 없어 대답을 망설였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달의 시간을 줄 테니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어 와라.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다."라는 무례한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남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한 달간 단백질 보조제를 섭취하고 운동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약속한 기일이 되었지만 남자의 몸은 한 달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체격을 키우기 위해 했던 노력과 최근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중요한 것을 위해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자존감 높은 사람’ 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남자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일주일에 4~5일씩 만나며 서로를 더 알아가고 맞추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내 배우자의 조건 첫 번째인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
내가 갖지 못한 ‘결단력과 결정한 것을 실행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임을 추가로 알게 되면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리고 만난 지 1년이 되었을 무렵, 서울 모처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지금도 가끔씩 뿌듯해하며 이야기한다.
“많은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당신이 세운 그 많은 허들을 내가 어떻게 넘었지?”
만 1년간 300번을 만나면서 단 한 번의 작은 트러블도 없었던 우리는
결혼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양가 부모님에게 드릴 용돈을 논의하다가 다투기도 하고,
육아 중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 누적으로 냉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의 건강문제로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당연히 시시때때로 기복은 있다.)
우유부단해 작은 결정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
걱정이 많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나,
꼼꼼한 듯 덤벙거리는 나,
섬세한 듯 터프하기도 한 나,
'나의 모든 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항상 긍정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
갑상선 절제수술, 췌장수술, 골다공증으로 인한 팔 골절수술 등
5년간 잇따라 일어난 자신의 건강문제에도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로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나라면 이미 멘탈이 무너졌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남편의 회복탄력성은 어디에서 생긴 걸까?’
앞 장(07화. 바람의 악순환 매듭짓기)에서 썼듯이
남편의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 어머니는 언제나 그 누구의 말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경청하신다.
그 상대가 어린이일지라도 존중하고 배려하며
아들, 손자뿐 아니라 며느리에게도 항상 따뜻한 말씀과 포옹을 해주신다.
그렇기에 친정과 갈등이 생겨 심적으로 크게 부침이 있던 시기에 어머니께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머니라면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 같았지만
친정을 욕보이는 것 같은 마음과 잘 크고 있는 줄만 알았던 손자에 대한 걱정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나 혼자 끙끙 앓아야만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어머니 은혜’ 노래 가사에 나오는 높고 높은 하늘처럼, 넓고 넓은 바다처럼, 언제라도 감싸 안아 주실 분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
어느 날, 온오프라인에서 유명한 교육자의 강연을 들었다.
그 분의 어머니는 자신과 그의 동생에게 "너희는 훌륭한 사람이 될거다."라는 말씀을 줄곧 해오셨고,
그런 믿음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믿음이 자녀에게 부담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우리 어머니도 나랑 형한테 항상 그러셨어요. 너희는 잘 될거라고."
"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어머니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고, 어머니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괜찮았아요."
어머니께서 남편에게 그러셨듯이
온전한 믿음을 주고 애정 어린 표현을 지속적으로 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더욱이 그 한 사람이 엄마라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불안, 긴장도, 예민도가 높은 (ADHD를 가진) 아이라면
자신에게 의미있는 상대의 믿음과 따스함을 온 몸, 온 가슴으로 받아들여
이 사회를 살아가고 성장하는데 든든한 자양분으로 쓸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려 애쓰지 마라.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그들은 믿는 만큼 자라는 신비한 존재니까.
- 박혜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