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타고 넘는 힘 2

| 불안도 높은 사람에게 필요한 지지 Ⅱ

by Journey


② 소통


30년 넘게 지났지만 내 여덟 번째 생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 생일 며칠 전이던 어느 날부터 부모님은 집에 안 계셨다. 아빠의 한쪽 허벅지 수술을 위해 병원에 가신 것이다.

이 기간 동안 10살 언니, 8살 나, 6살 동생을 우리 집에서 같이 사시던 둘째 고모가 돌봐 주셨고

내 생일에는 생일상을 차려 친구들도 초대해 주셨다. (고모들께 정말 감사하다.)

하지만 난 아빠가 왜, 어떻게, 얼마만큼 편찮으신지 정확히 모르고 고모 손에 맡겨진 상황이 슬펐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국민학교 중학년 무렵이었다.

우리 가정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사업을 하던 막내 고모부가 아빠 인감을 위조해서 빚을 내셨고,

그것이 잘못되어 부모님이 어렵게 일구신 많은 것들을 잃게 될 처지에 놓였던 것 같다.

내가 예닐곱 살 무렵 시골에서 올라와 경기도에 위치한 아파트에 사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언젠가부터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셨고 그곳을 방문한 난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께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기간 백방으로 노력하셨고 다행히 큰 손해 없이 마무리되었나 보다.


부모님은 ‘애들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집안 돌아가는 분위기, 사정을 눈치로 알아차리는 일이 많았고

그것이 짐작일 뿐인지 사실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주변에 관심이 많고 불안도가 높은 기질을 가진 나는 많은 상상과 걱정을 했다.


그래서 난 ‘내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우리를 둘러싼 사회, 가정의 상황을 잘 설명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을 실전에 적용하지 못해 Y에게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어느 해 2월 마지막 날, 여느 때와 같이 회사에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 아래쪽 느낌이 이상해 화장실에 가보니 약간의 피가 비쳤다.

둘째를 임신한 지 27주가 막 시작된 날이었다.


첫째 임신 중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혈은 다음 날인 3월 1일까지 이어졌고

아침 일찍 나, 남편, 첫째 Y 이렇게 셋은 급히 산부인과에 갔다.

'공휴일이라 일반진료는 불가능하고 분만실에서 응급진료가 가능하다'는 말에

간호사를 따라 나 혼자 분만실로 들어갔다.

남편은 20개월 된 Y의 걸음속도에 맞춰 저 멀리에서 걸어오고 있었기에

별도의 말이나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분만실에 못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나 먼저 분만실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나와 Y의 2주간의 생이별의 시작이었다.

예정일까지 3개월가량 남아있었지만 이미 자궁이 수 센티미터 열렸다고 했다.

하지만 태아가 너무 작아 최대한 뱃속에서 키우기 위해,

응급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분만실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다.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

분만실에 있는 동안 ‘어린 자녀는 엄마가 환자복 입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충격받는다.’는 맘카페의 글을 보고는 아이와 단 한 번도 통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되던 날,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임신 28주 0일이 되는 0시를 막 넘긴 새벽에 제왕절개로 출산해야만 했다.

NICU(신생아 중환자실)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있는 1.49kg짜리 둘째를 마주한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엄마와 생이별로 첫째 Y의 분리불안이 시작된 것은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때 첫째는 20개월에 불과했지만 말이 빨리 트여

이미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발화량도 많았다.

하지만 나의 갑작스러운 입원 이후 아이는 말도 표정도 없어졌다고 한다.


‘내가 분만실로 들어갈 때 인사라도 했다면......’

‘분만실에 있는 동안 영상통화라도 했다면......’

수 없이 후회했다.


Y는 내가 병원에서 몸조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내가 어디를 가나 따라다녔다.

집 안에서 조차 엄마가 안 보이면 울며불며 이 방 저 방 찾아다녔던 터라

목욕을 할 때에도, 볼 일을 볼 때에도 문을 열고 있어야 했고,

항상 같이 자야만 했다.

복직 후 회식이 있는 날은 회식장소에 와서 엄마를 만나야만 오열을 멈추었다.


“S 낳으러 갔을 때 엄마 없어서 무서웠어.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마요. 엄마 회사에 가서 얘기해.”

51개월 된 아이가 처음으로 2년 전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심리상담센터에 가서 아이의 분리불안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

‘이 상처가 무의식에 남아 어른이 되어서 연인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며

놀이치료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엄마는 어디 안 간다.’는 믿음을 꾸준히 심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 일찍 출근해야만 할 때, 늦게 퇴근해야만 할 때뿐 아니라

집 안에서도 아이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순간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는 내일 우리 Y 일어났을 때 회사 가고 없을 거야.

엄마가 내일 아침 6시까지 회사에 가야 하거든.

엄마가 안 보여도 놀라지 말고, 회사 갔구나 생각해. 알았지?

대신 Y가 어린이집 갔다 와서 저녁 먹기 전까지는 꼭 올게. 약속~”

“엄마 화장실 갔다 올게.”

“엄마 이제 볼 일 거의 다 봤어. 조금만 기다려줘.

열만 세어 보자. 10, 9, 8, 7, 6, 5, 4, 3, 2, 1! 짠!

기다려줘서 고마워.

우리 Y, 엄마 기다릴 줄도 알고, 많이 컸네~”


다행히 아이는 서서히 나아졌고

6살 무렵에는 아이의 기억 속에서 엄마와 분리되었던 기억이 사라진 듯했다.


계획했던 일이 변경되면 화를 내고, 예상하지 못한 일에 당황하는 Y와 S.

평소, 많은 대화로 안심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신뢰받는 엄마’가 되기 위해서.


‘아이들이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부담되는 상황이라면 센스 있게 돌려서 말해주자.

부모로부터 직접 듣는 설명이 무언(無言) 보다 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엄마 이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아직 몰라도 돼. 크면 알게 돼."라고 이야기하시는 법이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대답을 해주셨다.

애들을 애들 대하듯 안 하고,
어른한테 하듯 아이들에게도 성실하게 대화해 주셨다.
"엄마가 나를 큰 애 취급해 주는구나."라며,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해도 속으로 뿌듯했다.

- SBS 집사부일체 <이적 출연 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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