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받아들이는 연습
첫 눈, 아니 두 눈에 마티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바로 마티가 될 수는 없었다. 굳이 연인 관계에 비유해 보자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도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실 많은 연인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건 결코 서로가 될 수 없는 서로를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하나로 묶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묶으려고 할수록 풀리고, 풀리다 끊어져 버리는 관계를 나는 너무 많이 봤다. 그리고 끊어진 걸 다시 묶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묶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온전했을 서로의 모습이 닳고 헤져버리는 게, 그렇게 제 갈 길 가는 게 마음이 아팠다. 떨어진 끈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까, 온전하게 서로 묶일 다른 끈이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그리고 우리를 믿지 않았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괴로워하던 내게 아빠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여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 마음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리송하고 또 어리둥절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일들은 그 속에 숨어있는 가시로 나를 찌르지는 않을까? 내 머리와 이성으로 먼저 뭉툭하게 만들고 마음으로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해와 인정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날들이 많았다. 겨우 받아들임의 의미를 깨닫고 나아가려는 내게 시간은 또 내 편이 아니었다.
마티가 되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아직까지 마티는 나에게 타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유독 힘들어하는 내게 내 배역이라고 다를 건 아니었다. 일단 난 겁에 질렸다. 마티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다른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하는 영상을 많이 찾아봤는데, 영상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나와 다른 모습이 두드러졌다. 다르다는 것은 호기심을 자아냄과 동시에 두려움을 야기한다. 안전한 내 세계 속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세계에 들어가도 되는지 주저하게 된다. 실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고 환영받고 싶다. 함께 경험과 가치를 공유하고 싶다. 그렇지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고 받아들여진다 한들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나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난다. 다시는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무서워진다.
그럼에도 이미 마티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나와 다른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여보자! 우선 내가 제일 처음으로 했던 것은 마티의 외양을 따라 해 보는 것이었다. 다른 배우들이 해석한 마티의 모습, 대본을 읽어 내려가며 내가 그린 마티의 모습, 영화 <그리스> 속 마티의 모습을 참고했다.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옷차림, 손동작, 표정, 가지고 다니는 소품, 눈빛 등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파악하는데 아주 좋은 지표이다. 물론 사람은 영악한 동물이라 충분히 겉모습을 꾸며낼 수 있지만, 영화나 극에서 보이는 겉모습은 캐릭터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충실히 이를 받아들였다.
연습을 갈 때 하이틴 영화 속 소녀들이 자주 하는 스타일의 헤어밴드나 리본 모양의 머리끈 등을 착용했다. 프린팅 티셔츠에 테니스 스커트를 입기도 했다. 보통은 안무 연습을 하기에 편하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녔지만 할 수 있는 한 마티의 공주스러움과 소녀스러운 분위기를 연습 때도 내보려고 노력했다. 원래의 목소리보다 높은 음으로 대사를 했고 애교스러운 말투와 음색을 가미했다. 대사를 할 때는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표정도 지어보고, 노래를 할 때는 '어른스러운 사랑'이라는 자신이 만든 백일몽을 꿈꾸는 소녀가 되기 위해 직접 안무를 준비하고 연습했다.
마티가 되는 게 점점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나를 잊고 타인이 되어본다는 건 낯설지만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끔은 짜릿하다고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너무 보이는 마티에만 치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공연은 보여주는 예술이기에 당연히 겉모습에 집중을 해야 하지만, 그 이면에 분명히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메시지가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취미라고 해도 예술의 한 영역을 하는 만큼 나는 마티를 더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1972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올린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개정을 거친 극이긴 했지만, 애초에 극작가가 마티라는 역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수첩에 'Marty가 되려면'이라고 제목을 적고 그 밑에 마티에 대해서 내가 생각한 점과 느낀 점을 적어 내려갔다. 마티의 대사량이 적었기 때문에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다만 내가 주목한 가사가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 오프닝 곡인 'Grease is the Word'에서 *핑크레이디(The Pink Lady)가 등장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부분이었다. "아프고 지친 날도 있겠지" 하고 마티의 친구인 잔이 노래를 부르면 그 뒤를 받아 마티가 "울고만 싶겠지"하고 노래를 한다. 천연덕스러운 백치미를 뽐내며 이 세상에는 환상과 사랑만이 가득한 것처럼 구는 마티가 사실은 울고만 싶었던 걸까? 갑작스레 마음이 쓰였다.
울고 싶었던 마음을 애써 감추고 친구들에게 여느 때처럼 밝은 척을 하며 '그래, 프레디가 날 떠난 게 아닐 거야. 저 멀리서 날 그리면서 기다리고 있겠지? 언젠가 돌아오겠지?' 하고 자신을 속인 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은 여느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아니라 오빠들에게 어울릴법한 성숙한 여인이니까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은 나와 비슷했다. 사실은 보호받고 싶은 여린 마음을 지녔지만 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그래서 외로워도 아닌 척 살아가는 게 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많아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는 것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진짜 감정을 속이면서 살아가는 건 같았다.
마티를 그저 받아들였건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했건 어느 순간 나는 마티를 닮아가고 있었다. 더 이상 분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는 서연이 아닌 마티가 되어가고자 했다. 신기한 건 이렇게 했더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마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애교가 묻은 목소리, 표정, 제스처 등 내가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나만의 마티가 되어 흘러나왔다. 더 신기하고 놀라웠던 건, 같이 뮤지컬을 하는 동료들이 내가 정말 마티 같다고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찰떡 마티' 혹은 '인간 마티'라고 부르며 마티 그 자체라고 평해주었다. 그 말들이 얼떨떨하면서도 고맙고, 또 기분이 좋았다. 내 모습이 아닌 걸 애써 뽑아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태생부터 마티인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랑해 주었다. 나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마티가 되었고 그럴수록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서툴다. 나와 타인 간의 적정한 거리를 알아내는 것도 힘들고, 그 간격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나는 지나치게 가까워지거나 지나치게 멀어졌다. 마음에도 없는 표정을 지었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끈끈하게 묶이는 것도 두렵고 풀리거나 끊어져 버리는 것도 두려웠다. 어쩌면 뮤지컬을 하면서 타인과 나의 관계 맺기를 연습하고 실험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또 다른 나인 배역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묶으려 하지 않고 그저 풀려버리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는 적정함을 찾게 되길. 지금도 소망한다.
*핑크레이디(The Pink Lady)
리조(Rizzo), 마티(Marty), 프렌치(Frenchy), 잔(Jan)으로 이루어진 뮤지컬 <그리스> 속 여학생 무리. 남학생 무리인 티버드(T-Bird)와 함께 어울리곤 한다. 샌디(Sandy)는 전학생으로, 처음에는 핑크레이디와 대척점을 이루지만 나중에는 화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