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인 Oct 17. 2022

무대 속 무대

삶의 이중 레이어

삶이 무대라면 내가 오르는 뮤지컬 무대는 무대 속 무대일까?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 가끔 혼란에 빠졌다. 우선 마티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나의 마티스러운 면모가 숨어있다가 연기를 통해 이제야 나온 건지, 어느샌가 이 캐릭터에 스며들어서 마티와 동화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은 적이 있는데, 나도 그런 걸 겪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헷갈렸던 건 어떤 무대가 나의 진짜 무대인가 하는 점이었다.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관객석에서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공연 무대가 말 그대로 '무대'였다. 하지만 삶과 무대와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은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없을 뿐 하나의 '무대'였다. 내가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라면 나의 삶 즉,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몸담고 있는 회사, 자주 가는 장소 그 모든 곳이 무대였다. 그리고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같은 배우였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뮤지컬 무대는 그냥 무대 속 무대일 뿐이었다. 이미 인생이라는 무대에 내던져진 내가 무대 위 무대에 올라 또 다른 삶을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 삶을 내 무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보통 무대라고 하면 화려한 조명이 나를 비추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예쁜 모습, 멋진 동작, 나다움을 마음껏 드러내는 곳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주목하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있고 나는 높은 무대 위에서 때론 위에 있는 관객석을 올려다보며 가슴 벅차 하며, 때론 아래에 있는 관객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이런 감격스러운 무대의 순간이 일상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꿈꾸던 일을 하게 되면 얼마간은 마음이 벅차오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많이 없으니까 나는 행운아인가 싶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사랑하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그 사실에 감사했다. 큐레이터로 미술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의 무대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술관의 전시장은 작품이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큐레이터나 스태프들은 작품과 작가를 돋보이게 하는 일을 한다. 나는 꼭 비밀스러운 무대 뒤편에서 은밀하게 일하는 사람 같았다. 내 마음이 시킨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제 가치를 발하는 무대를 만듦으로써 나도 뿌듯하고 관람객들도 잠시나마 삶의 아름다움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이곳이 내 무대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무대 뒤편에 있는 내가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고요하고 행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시장을 둘러볼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현실적이고 세세한 일들이 나를 옥죄었다. 연습실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연기하는 내 모습이 진짜인 것만 같았고, 이곳에서는 또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태생적으로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하는 기질 때문이었을지 혹은 꿈이 일상이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그 비루함에 내가 또 지겨워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대 뒤 스태프의 역할로도 만족할 거라고 여겼는데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인 건가? 내가 철없고 허황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곳이 진짜 나의 무대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가 원하는 만큼 결과를 얻지 못해도 그것 또한 내 인생이 쓰인 대본의 일부이다. 나는 나를 위해 마련된 각본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며, 그렇기에 지금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해도 괜찮다. 이렇게 현실 속 나를 다독였다.


무대와 무대, 무대 속 무대에서 혼란스러웠던 건 어쩌면 두 무대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 인생도, 뮤지컬이라는 무대도 다 잘 해내고 싶었다. 일도 취미도 인생의 한 부분이고 둘 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기에 어느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의 씁쓸함은 뮤지컬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이 달래줬고, 공연을 향한 마음이 과도하게 커져 있을 때는 일상이 현실도 좀 돌아보라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삶의 두 무대는 나라는 배우의 균형을 맞추어 주었다. 결국 어느 한 무대는 곧 내려와야 했고 나는 다시 흔들릴 뻔했지만...


이전 05화 아임서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