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인 Oct 21. 2022

무대를 욕망하다

가벼워지기 위해

"너는 무대 체질이야."


이렇게 말씀하신 엄마는 피아노 연주회 당일에 내게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긴 발레 *튀튀(tutu)를 입히셨다. 이유는 드레스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보통 튀튀를 입을 때는 발레 타이즈를 신는다. 튀튀가 얇을 경우에는 타이즈를 신어도 다리가 비쳐 보이기는 하지만 맨다리에 튀튀를 입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무대 위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난 맨다리에 튀튀를 입었다. 어린아이였지만 창피했다. 누가 정말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다리가 비치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싶었을까.


나는 무대 체질답게 도망가지 않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창피했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내려가지 않고 끝까지 준비한 연주를 마쳤다. 박수소리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박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나에게 박수를 쳐줬을까 하는 것이다.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안고 내려오지 않았을까. 아무리 강한 척해도 나는 아이였으니까. 그땐 엄마를 원망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저 무대에 올랐을 때 따라오는 수치심은 내 몫일뿐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 후로도 여전히 난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기에 그때 경험한 수치심이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 앞에 나가 발표도 곧잘 했고,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나와서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시면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경험 자체는 사라져도 감정은 기억 어딘가에 깊숙이 저장되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근하고 교묘하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 앞에 나타나 인생을 훼방 놓는다. 


무대 위의 내 모습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무대 위에 서면 나는 당당해졌는데, 그건 나를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당함 속에 묘하게 섞여 들어 있던 어색함과 수치심이 관람객들 눈에도 보였던 걸까? 나는 칭찬과 응원보다는 비난과 야유를 더 받았다. 무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무대 위 사람들의 많은 걸 읽는다.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의 공적인 영역 말고도 그 이면에 있는 어떤 사적인 것까지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부끄러운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영물이라 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지 대번에 눈치챈다. 그들 중 공연히 다른 사람을 괴롭히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 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남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지. 내가 싫어해도 되겠다."


환영받지 못한 사람은 위축된다. 오르기 좋아했던 무대를 스스로 내려오게 된다. 학창 시절의 조그마한 무대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카메라 앞에 서면 활기가 돌았지만 결국 오래지 않아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생의 활기를 그렇게 자의로 내려놓았다.


그 후로는 회사원의 삶을 살았다. 대기업, 로펌, 공기업 등 다녀볼 만한 회사는 다 다녀봤다. 미술을 좋아해서 미술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물리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삶이 아니라고 결코 가볍게 여길 삶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삶은 더 묵직했다.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하는 일을 한다는 건 내 욕망을 누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밖으로 분출해야 가벼워질 텐데, 언제나 나를 누르는 돌덩이 같은 욕망이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니 마음도 무겁고 삶도 무거웠다. 그 무거움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게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욕망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무섭고 부끄러워서 숨는 삶이 아닌 내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 놓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욕하고 비웃겠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충실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면 한없이 무거워지지만 나를 만족시키면 가벼워지니까, 나는 이제 그만 가벼워지고 싶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온 말처럼 무거운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쿤데라에 따르면 무거움에는 생명력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가벼움에도 역시 다른 종류의 생명력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위대한 문학가의 말도 의미가 있지만, 다 떠나서 내가 무거워서 질식해 버리겠다면 나는 또 다른 생명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다시 무대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욕망이 기나긴 수치심의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가 된 것이다. 그 '때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그 사실이 놀랍다기보다는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욕망은 보통 그 단어가 가진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 욕망에 충실한 사람은 이기적으로 여겨진다 - 설 자리를 잃을 때가 많지만 가끔은 이기적이어도 될 것 같다. 어린아이가 순수한 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기적임 때문이다. 그리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되려 순수하다. 나는 또 한 번 어린아이가 되어 순수하게 욕망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튀튀(tutu)

발레리나가 착용하는 스커트. 나일론이나 얇은 모슬린 등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다. 길이가 발목까지 내려오고 종 모양을 이룬 것을 로맨틱 튀튀라 하고, 무릎 위까지 짧은 것을 클래식 튀튀라고 한다. (두산백과 참고)

나는 초등학생 때 나간 피아노 연주회에서 하얀색의 얇은 로맨틱 튀튀를 입었다.


*밀란 쿤데라는 1984년 발표한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무거움의 생명력을 남성의 하중을 갈망하는 여성에 빗대어 표현한다. 





이전 07화 빛이 나를 비추지 않는다 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