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건 천사
사랑받는 법을 알려준 마 프렌치(Ma Frenchy)
요새는 조금 뜸해졌지만 나는 밤마다 자기 전에 꼭 기도를 드리곤 했다. 무슨 종교이든 기복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한국 사회에 물든 사람인 탓에 기도의 내용은 "~해주세요."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필요할 때만 신을 찾으면서 으레 인간은 원래 그런 게 아니야? 하는 뻔뻔함까지 장착했다.
한 번도 신께 천사를 내려달라고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기도를 올리는 나를 보며 신은 내게 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 천사는 어느 날 인간의 형태를 하고 내 앞에 나타났는데, 그건 바로 <그리스>에서 *프렌치(Frenchy)라는 역을 맡은 지혜였다.
내가 애칭으로 '마 프렌치(Ma Frenchy)'라고 부르는 지혜와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음과 결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친해져 있는 법이다. 또 뮤지컬 사람들과는 <그리스> 속 배경인 미국의 라이델 고등학교에 처음부터 함께 다니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지혜는 겨드랑이까지 오는 자글자글한 파마머리가 인상적인 친구이다. 미용 용어로 히피펌이라고 해야 하나? 이마 위쪽부터 시작해서 내려오는 얇게 구불거리는 컬이 히피의 자유스러움을 연상시켰다. 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매력적인 헤어스타일이었다. 선뜻 용기 내어 도전하지 못한 걸 이 친구가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지혜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중에야 지혜는 일반 파마를 했는데 우연히 컬이 그렇게 나온 것일 뿐 파격적인 도전 같은 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실현시키지 못한 내 로망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혜도 나를 좋아했다. 친해지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나를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말해주었는데,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내겐 그냥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냥' '좋아한다'라는 건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지혜는 표현도 잘했다. 처음에는 내가 본인보다 열 살이나 많다는 사실에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럴 줄 몰랐다면서 한참 나를 쳐다보는 솔직함이 귀여웠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을 때는 갑자기 나를 보고 폭 안기더니 "내 마티... 인생이 힘들어"라며 징징댔다. 자신의 힘듦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모습 또한 인간적이었다.
지혜와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는 연습이 끝난 후 함께 카페를 가자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내가 좋지만 자존감이 낮다고 말했다. 지혜는 왜냐고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 봤을 땐 이래. 나는 내 모습이 좋거든? 그런데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예를 들어, 나는 쉽게 감동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내 모습이 좋은데 누구는 이걸 보고 나이브하거나 철이 없다고 생각해. 나는 내 감각이 세심한 게 좋은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해."
"언니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 말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이 너무도 고맙고 또 놀라웠다.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바람을 지혜는 한 번에 알아차렸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연예인들의 화보 촬영을 담당한 디렉터로 일하셨던 분이 나보고 연예인 기질이 있다고 했다. 본인은 수많은 연예인들을 봤는데 나와 비슷한 성향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이미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게 그 반응에 신경 쓰며 우울해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가? 하고 흘러들었는데 지혜까지 그렇게 이야기하니 내 안에 정말 그런 성향이 있나 싶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고마워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늘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었으려나. 정말 이분이 말씀하신 연예인 기질이라도 있는 건지. 재능은 없는데 기질만 이렇다는 건 큰 문제였다. 셀러브리티라도 되어야 나의 뻥 뚫린듯한 마음이 채워지는 건가 궁금해졌다.
연예인도 아니고 셀러브리티도 아니기에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았을 때의 마음 상태에 관해서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내 성향을 알아차리고 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말해준 지혜가 고마웠다.
"언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야겠다는 생각을 버려. 인정받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럼 언니만 더 힘들 뿐이야. 안 그래? 언니가 언니 자신을 사랑하기에도 힘든 판국에. 또, 이렇게 언니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잖아."
물론 이렇게 말해도 고마웠겠지만 뭐랄까 이런 위로는 내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거라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을 것 같다. 날 때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마음을 가진 내 원래 모습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모습, 그 모습에 나는 프렌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프렌치는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었다. 마티의 솔로곡인 '프레디 마이 러브'를 부를 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끼를 다 부리면서 노래를 하고 춤을 췄는데 (그래야만 했다.), 노래 중간에 현기증 난다는 듯이 "어! 어! 어! 어!" 하면서 몸을 꺾어서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안무가 있었다. 원래는 혼자 뒤로 넘어갔다가 일어나는 걸로 연습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내 모습이 불안해 보였는지 지혜가 자신이 등을 대주겠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마음껏 기대었다가 반동으로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지혜와 합을 맞추어야 하는 중요한 동작이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에게 내 몸을 한껏 기대는 게 미안해서 연습하자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주저주저하며 기대는 내게 지혜가 말했다.
"언니, 나 못 믿어? 나 믿고 그냥 해!
"언니의 무대니까, 언니가 제일 예뻐야 한다고!"
내가 내 무대에서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제일 예뻐야 한다는 지혜, 아니 프렌치. 나를 무대에 올려주기 위해 자신의 등을 기꺼이 내어준 나의 프렌치. 어릴 때 공주병이라고 비아냥만 들었던 내게 정말 '공주'라고 불러주는 마 프렌치. 극 속에서 마티와 프렌치가 친구였던 것처럼 우리는 열 살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정말 친구가 되었다. 프렌치가 극 중에서 자신을 지켜줄 천사를 찾으며 불렀던 노래 '내게 필요한 건 천사'처럼 나도 나를 이해해줄 천사가 필요했는데 지혜는 천사가 되어 내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너에 대해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하니 지혜는 대뜸 "내 이야기? 비판도 좋아."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프렌치 러브'라는 렌즈가 눈에 껴져 버려서 좋은 이야기만 썼다는 내게 그 렌즈 영원히 빼지 말라는 지혜를 앞으로도 나는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천사가 별건가. 날개를 접지 못해 땅까지 내려오지 못한 천사가 자신 대신 친구의 형태로 지혜를 내려보낸 것은 아닐까.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어른스러워서 기대고 싶은, 그리고 그녀가 힘들 때는 나 또한 어깨를 기꺼이 빌려주고 싶은 프렌치가 바로 나의 천사이다. 그리고 나는 프렌치라는 천사 덕분에 사랑받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내게 필요한 건 천사(All I Need is an Angel)
: 프렌치가 극 중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뷰티 전문가가 되고 싶은 프렌치는 학교도 그만두고 뷰티스쿨에 입학하지만, 하루 만에 뷰티스쿨에서 퇴학당한다. 그때 느낀 실망감과 절망감을 담아 부르는 노래가 바로 '내게 필요한 건 천사'이다.
*프렌치(Frenchy)
: 뮤지컬 <그리스>의 핑크레이디 멤버 중 한 명. 전학 와서 핑크레이디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샌디를 잘 챙기며 뷰티 전문가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가는 멋진 친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