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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Oct 24. 2022

*서머나잇(Summer Nights)

어차피 지나가버릴 한여름밤의 악몽

"나가! 당장 나가!!!"


8월의 마지막 날, 상사는 내게 소리쳤다.


"네, 나갈게요!"


이제는 정말 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되받아쳤다. 부러 구두 굽으로 바닥을 세게 눌러 또각거리며 사무실 문을 나섰다. 퇴근 시간인 오후 6시가 되기 전이었다. 나는 마지막이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초록색 원피스에 검은색 날렵한 구두를 신고 출근을 했었다.


멍한 상태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머릿속은 멍했지만 모든 것은 명쾌해져 있었다. 쫓겨나듯 사무실을 나가기 직전에 함께 일하던 다른 계열사 부장님께 전화가 왔다. 급하게 퇴사하게 되어 자료를 못 드려 죄송하다는 내 말에 대뜸 "좋게 나가시는 거죠?"라고 물으셨다. 나가는 건 좋지만 좋게 나가는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부장님은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전에도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이 그렇게 많이 나가셨거든요."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중요 업무 배제와 특정 업무의 과도한 배정, 은근한 따돌림이라는 괴롭힘을 겪고 떠밀리듯 회사를 떠나는 것이었다.


막 인생의 무대에서 떠밀려 나온 나는 그 길로 연습실로 향했다. 나를 위해 준비된 다른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 무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연습을 가야지만 살 것 같았다. 이미 현실에서는 죽었기에 가상의 무대에서라도 살아있고 싶었다.


슬프고 억울해도 꾹꾹 눌러 참은 게 화근이었을까. 울면서 어렵게 도착한 연습실에서 그만 화가 터져버렸다. 친하게 지내는 뮤지컬 팀 동생 중 한 명이 몸이 좋지 않다길래 혹시 코로나일까 하여 자가 키트를 사다 줬다. 동생의 몸 상태가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이미 한차례 코로나가 우리 팀을 휩쓸고 지나간 터라 공연과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공연 5일 전, 이제는 한 사람이라도 걸리면 공연은 올라갈 수 없을 터였다. 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내 눈에는 자꾸 이 동생이 검사를 미루는 것처럼 보였다. 자가 키트를 해보지 않아 미숙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미적거리는 걸로만 보였다. '혹시 양성일까 봐 무서워서 검사를 미루는 건가?' 화가 치밀었다. 회사에서 이미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데일 대로 데인 상황이었다. '다들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러냐고! 나는 할 만큼 했어, 왜 다들 날 무대 위로 오르게 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팩! 하고 일어났다. "나 갈게!" 이 한마디를 던지고는 연습실을 나섰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터덜터덜 다시 한번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여름의 마지막 날 밤, 지독하다 싶었다. 여름만 되면 아팠기에 여름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여름 생이다. 봄에서 여름이 되는 6월, 그 6월의 중순 첫날이 바로 내가 태어난 날이다.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넘어가면 묵은 것을 떨쳐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태어난 날이 그 경계에 걸쳐있기 때문에 나는 늘 아팠던 걸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게 속해있던 것을 떨구고 새로워지는 것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한다. 매년 찾아오는 아픔이지만 매년 새로웠다. 그 아픔이 무서워서 여름이 되기 전에 이번에는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올여름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뮤지컬을 하게 되었다. 같이 연습하는 시간도, 혼자 연습하는 시간도, 심지어는 연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시간도 다 행복했다. 흔히들 청춘을 여름에 비유하곤 하는데,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이 을씨년스러운 겨울 같았다. 청소년기에 공부만 하며 지냈기 때문에 딱히 그 시절을 기억할 만한 추억이 없다. 그런데 빼앗긴 청춘을 돌려받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올여름은 내게 너무나 찬란했다. 그래서 행복했는데...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을 만큼 난 정말 아이처럼 행복했는데... 이번에도 여름은 내게 아픔을 안겨주었다.


그때 문자가 왔다. 


"언니, 전화 한 번만 받아주세요." 


연습실에 함께 있었던, 샌디 역을 맡은 다른 동생이었다. 아마 조금 전에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내가 화가 나서 전화를 받지 않은 줄 알고 문자로 전화를 받아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샌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눈에는 00이 검사를 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지금 코로나에 걸리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지 않느냐. 나는 최대한 도와주려고 한 건데 속상하다. 그러고는 끝내 덧붙였다. 나 오늘 회사에서 나왔는데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부당한 일을 당했다. 쫓겨나듯 나왔다. 그래서 나도 화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었다는 걸 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연습 못하게 되어서 미안하다......


샌디 역을 맡은 예진이라는 동생은 내가 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서는 함께 분노해 주고 애꿎은 다른 동생에게 화낸 일은 언니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해주었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구구절절 내 감정을 털어놓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누구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통화를 하며 열차 칸 안에서 또 울었다. 체면이고 예의고 차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예진이는 따로 문자를 또 보냈다.


"언니 한낱 악몽처럼 없던 듯 금방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극복할 힘이 모자란 것 같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전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요. 진심으로 언니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요."


"고마워. 00 하고도 잘 이야기하고 풀게. 서연은 아직 힘이 부족해도 마티는 할 수 있어!"


"언니 마음 정리되는 대로 천천히 해요. 마티가 아니라 무대 밖 서연 언니도 항상 행복하길."


통화 말미에 예진이에게 말했다. 너와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이 한여름밤의 악몽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그저 짧게 끝난 꿈을 꾼 것만 같아서 그 일은 이제 존재하지도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고, 이 모든 걸 한순간에 잊게 해 준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행복'만' 하길 바란다는 말도 처음 들어봤다. 그 어떤 슬픔도 분노도 힘듦도 내게는 다시 오지 않길 바라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뻤다.


그러고는 이제는 무대를 옮겨갈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내 무대라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곳은 나와 맞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서 있을 곳은 진정한 나의 행복을 바라는 따스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힘을 내고 싶었다. 다른 무대에서 막 떠밀려 나온 서연은 패잔병처럼 힘이 없지만, 진짜 나의 무대에 오를 마티는 아직 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고 믿고 싶었다. 더욱 마티가 되어 성공적으로 공연을 올리고 싶었다. 마티뿐만 아니라 서연으로도 행복하길 바라는 예진이를 보니 나는 이제 서연으로도, 마티로도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한여름밤의 악몽이든, 한여름밤의 꿈이든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인생이 하나의 책이라면, 그리고 한여름밤의 악몽이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챕터였다면 이제는 그냥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 혼자의 힘으로 넘기기 힘들었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잠깐 빌려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해 늘 아팠던 나는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힘에 부쳤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페이지마다 떨어진 내 눈물이 어룽져 있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낡아버린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울고 있던 나를 대신해서 예진이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자가 키트 문제로 화를 내었던 동생과는 따로 이야기해서 서로 오해를 풀었다. 얼마 전에 만나서 밥을 먹으면서 그날 사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한여름밤의 악몽이었지만 아직 슬픔은 남아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동생은 이야기를 듣고 놀라더니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괜한 오해를 해서 이 동생을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다시 미안해졌다. 그럼에도 못난 언니를 이해해 주고 함께 해 줘서 고마웠다.


이제는 여름도 다 지나가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을의 한가운데에 접어들었다. 무대도 끝나고 나는 아직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맞이하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뮤지컬을 하게 되어서 그 무대를 기다리고는 있지만 진짜 내 인생이 펼쳐질 무대는 어떤 무대일지, 언제쯤 오를지, 아니 날 위한 인생의 무대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한여름의 뜨거웠던 날들이 지나가면 적정한 빛과 온도를 지닌 가을이 된다. 그렇게 그저 나만의 적정온도를 찾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서서히 물드는 단풍처럼 내게 새로운 날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이제는 덜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서머 나잇(Summer Nights)

뮤지컬 <그리스>의 대표적인 넘버. 남녀 주인공인 대니와 샌디가 여름날에 만나 서로 사랑했던 이야기를 각각의 시점에서 함께 부르는 곡이다. 대니는 친구들에게 샌디와 있었던 일을 부풀리면서 허풍을 떨고, 샌디는 친구들에게 소녀다운 감성으로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다. 이제 막 사랑을 알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짧게 끝난 한여름밤의 사랑은 이후 대니와 샌디가 라이델 고등학교에서 재회하면서 다른 양상으로 다시 시작된다. 나의 힘들었던 일을 한낱 한여름밤의 악몽으로 짧게 끝나게 해 준 예진이가 바로 이 샌디 역을 맡았다. 나는 예진이에게 내 샌디는 '예진이 너'라고 말한다. 샌디를 하고 싶었지만 예진이야말로 정말 샌디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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