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인 Oct 25. 2022

약속된 무대

인생에 먼저 손 내밀어보기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 비단 연인 관계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유는 누군가를 믿고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바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데 사랑이 생겨날 수 없다. 설령 다른 이유로 사랑이 싹튼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그 사랑은 버틸 힘이 사라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는 의심이 많다. 한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믿고 마음을 내어주지만, 내가 정해놓은 경계선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잘 주지 않는다. 믿지 못하기에 마음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 믿고 싶지만 불안해서 그 마음을 유예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나 믿고 아무에게나 마음 주었다가 다친 사람은 마음을 주고받는 게 서툴러진다. 


그래서 신뢰를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괜히 불안해지는 나를 잠재워주는 그런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바랐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는데 나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줄 수 없는 것을 바란 대가로 나는 비참해지곤 했다. 나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나 역시도 나를 신뢰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믿음이 부족한 사태는 모두를 불안이라는 허공에 둥둥 뜨게 만들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자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높아진 경계심은 누구도 다가오게 만들지 못했다. 믿음을 주어야 할 사람은 나의 불신을 탓했다. 사람과 세상을 믿지 못해 괴로워진 나는 이 모든 게 다 내 탓이라는 생각에 이중으로 괴로워졌다.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알지만, 나밖에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게 많이 외로웠다.


기다리는 걸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다리는 것도 내려놓게 되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기다린다는 건 약속이 있다는 것이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었건만 세상이 내게 약속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 기다리고 싶었다. 


그런데 무대는 달랐다. 무대는 약속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공연은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장소에서 반드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아닌 나와 우리를 위한 무대가 특정한 날짜와 특정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물론 지금처럼 전염병 시국, 배우의 컨디션 악화, 제작사의 사정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약속된 무대도 취소되거나 지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불가피하고도 예외적인 경우이고, 보통 무대는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설 <그리스>의 무대는 2022년 9월 4일이라는 정확한 날짜에 약속되어 있었다. 나는 그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5개월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한 나를 제련시켜서 무대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무대 하기 한 달 전쯤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자가격리 기간은 일주일이고 그전에 나을 테지만 갑갑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연습한 걸 까먹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연습을 가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문제는 자가격리 기간이 끝나도 코로나 후유증이 계속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침이 심하게 났는데 하루 종일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특히 더운 곳에 있다가 에어컨이 틀어진 곳에 들어간다거나 하면 성대가 자극되어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연습을 할 때도 정말 걱정을 많이 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서 연습하는 일명 '런'이라는 것을 계속 돌았는데, 그 시간 동안 기침을 할까 봐 염려했다. 나도 불편하지만 내가 계속 콜록거리면 분명 연습에 지장이 갈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1시간 40여 분의 런을 돌 때면 항상 기침이 멎었다는 것이었다. 최종 공연 전까지 대여섯 번은 돌았던 것 같은데 정말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기침이 나지 않았다. 대신 연습이 다 끝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를 기다리는 무대와의 약속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마음이 발현된 것이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없던 의지력이 생겨나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인생이 지겹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붓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는데 왜 이렇게 채워지는 게 없는 걸까. 인생을 믿을 수 없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정직하게 살았는데, 착하게 산 것 같은데 왜 이리 돌려받는 게 없지. 나에게 약속된 게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나태해졌다. 인생의 무대 위에 오르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굳이 내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에 충실하기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이미 자신만의 무대 위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그리고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소셜 미디어를 보는 것이었다. 오늘도 별다를 바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데, 그런 나의 하루를 소망하고 계획하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확인하는 데 더 시간을 썼다. 잠들기 전에 나의 하루를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은 어떤 하루를 보냈나 궁금해했다. 약속된 게 없는 불안을 그렇게 달랬다. 내게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삶을 지연시키며 보냈다.


여전히 인생에서 나에게 약속된 건 없다. 언제나처럼 희뿌연 안갯속을 정처 없이 거니는 느낌이다. 이렇게 방황할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괜히 태어나서 아무것도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게 고단했다. 실은 종종 길을 잃은 탓에 이것저것 경험해 봤으면서, 그렇게 나도 모르게 삶을 풍요롭게 채워나갔으면서 저 끝에 있는 목표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인생을 탓했다.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기로 했다. 인생이 내게 약속한 게 뭔지 아직 모르겠다면 내가 인생에 약속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 조서연은 이러이러하게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이러이러하게 살겠다고 내 인생에 믿음을 심어주는 건 어떨까. 한쪽이 약속을 잡지 않으면 내가 잡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면서 신뢰와 믿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면 인생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뮤지컬 무대도 내가 약속을 잡았다. 이미 일정이 정해진 공연이었지만 내가 하겠노라고 약속을 잡고 그 시간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탓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생도 사람도, 내게 아픔을 주었던 그 모든 것들을 원망하는 마음은 고이 접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자발적으로 잡은 인생과의 약속을 지켜나가겠다. 어쩌면 인생도 내가 먼저 손 내밀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니까.




*고도(Godot)

아일랜드 극작가 사무엘 베게트(Samuel Beckett, 1906~1989)가 1952년 발표한 2막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에 나오는 실체 없는 존재. 극 중 인물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만, 고도의 정체는 결코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끝없는 기다림 속에 나타난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보여주는 사무엘 베게트의 대표작이다. 고도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이전 11화 *서머나잇(Summer Night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