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함의 유용함, 그리고 진정한 어른
어느 날 문득 퇴근을 하는데 어른으로 살아가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은 청소년기까지 합치면 고작 20년도 안 되는데, 남은 몇십 년을 책임감과 의무감만 가득한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깜깜했다.
시지프스의 형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이라는 돌을 애써 어깨 위로 떨쳐내면 다시 의무감이라는 돌이 굴러 떨어진다. 그 의무감이라는 돌을 다시 던져버리면 이번에는 체면이라는 다른 돌이 도르르 내려온다.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느라 어깨는 삭아가고 흐르는 땀은 마를 새가 없다.
일했던 곳이 광화문이라 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광화문은 명실상부 우리나라의 최대 일터이지 않나. 조금 더 정확하게 써보자면 어른이들의 일터이다. 나는 아직 마음은 어린이인데 몸이 어른인 탓에 어른 구실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어른이'라 부른다. 아직 어린아이 시절의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아있는데, 그걸 애써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놓고 지금 내게 주어진 과업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도 어른이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중학생 무렵부터 '유용성'에 지나친 가치를 두었다. 아이답게 지냈어야 할 시기를 성과와 목표에 집중하며 보냈다.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통해 날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히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저 나답게, 아이답게 있는 법을 몰랐다. 생활 반경은 집-학교-독서실-학원-집이었다. 친구들과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은 것도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초등학생 이후로 아이다운 허튼짓을 한 적이 있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뮤지컬 사람들과는 기꺼이 허튼짓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이 사람들과 노래방을 갔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자 동료 둘이서 노래를 부르는데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놀았다. 한 번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아본 적이 없는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봤다. 그리고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좋아 보였다. 순간에 몰두해서 다음 순간을 걱정하지 않는, 그런 고도의 집중력이 공부에 필요한 집중력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인생을 더 충실히 느끼는 거니까. 어린아이답게, 청소년답게, 청년답게 굴지 않았던 내 모습이 은연중에 스쳐 지나갔던 걸지도 모르겠다.
동료들과 어린아이처럼 노는 게 즐거웠다. 애어른도 아니고 어른이도 아닌, 정말 어린이처럼 해맑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놀았다. 팀 사람들끼리는 죽이 잘 맞아서 연습 시간 전후로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곤 했다. 가령 나는 예진이와 개별 연습하겠다고 모여서는 생뚱맞게 90년대 가요를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2000년에 태어난 예진이가 어떻게 90년대 노래를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15년의 격차를 건너뛰고 연습실에서 자자의 <버스 안에서>를 불러 젖혔다.
취미 뮤지컬을 하는 것도 사실 내게는 무용하다고 여겨지는 일 중 하나였다. 지금 프로 뮤지컬 배우가 될 것도 아닌데 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과연 내가 얻는 게 무엇일까? 하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사실 마음은 너무 하고 싶었지만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이고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며 이성으로 마음을 억누르곤 했다. 그런데 무용한 것이야말로 정말 유용한 것이었다. 나는 뮤지컬을 하면서 그저 무대에 오르는 행복을 누렸다. 살아있는 기쁨을 만끽했다. 사랑스러운 동료들을 얻었고 그 사람들과 쓸데없는 행동을 하며 다시 한번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재미를 느꼈다. 그냥 이런 게 삶인 것만 같았다. 사실 인생은 조금 더 단순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너무 고행처럼 사는 건 오히려 삶을 기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고 투게더(We Go Together)'는 뮤지컬 <그리스>에서 학생들이 서부지역 연합 댄스파티에 참여할 때 나오는 노래이다. "위 고 투게더, 라익 라마라마라마 디기 딕 딥디부, 리멤버 포에버, 아 슈밥바와라와라 이비디붐디붐" 이런 식으로 무슨 말일지 모를 외계어가 난무하는 노래이다. 안무도 우스꽝스럽고 신난다. 청춘의 열기가 느껴지는 파티 장면으로, 시끌벅적 요란하고 정신없으며 풋풋하고 아름답다. 이 노래를 부르며 안무를 하면 끝에 가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 한마디로 정말 죽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활기와 생생함이 내가 미처 느껴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찬란함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늘 즐거웠다.
공연을 올리기 전, 몇 번 남지 않은 연습 시간에 한 선생님이 "무대는 외로워요. 모든 걸 여러분이 혼자 감내하고 처리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나는 모르는 프로 배우들의 무대 위에서의 애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첫 뮤지컬 무대가 전혀 외롭지 않았다. 나는 내 배역의 몫을 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몫을 다 해냈다. 누구 한 명이 살짝 실수를 하면 다른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메워주었고, 무대 뒤에서는 서로에게 잘했다며 응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막의 마지막 씬(scene)인 '위고투게더'를 부르면서 함께의 즐거움과 가치를 여실히 느꼈다.
어쩌면 인생의 한 장면으로 넘어가버릴 청춘이지만, 그렇기에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나는 무심코 지나쳤던 어린 시절과 청춘을 뮤지컬 <그리스>를 하면서 되찾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허튼짓의 세계로 나를 안내해 준 우리 순수하고 귀여운 팀 사람들을 정말 사랑한다. 참, 동료들은 허튼짓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대화를 나눠보면 통찰력도 있고 생각도 깊다. 그리고 그 생각을 서로 나눌 줄 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더욱 아름답다. 진짜 어른은 아이다운 순수함을 간직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뮤지컬을 하면서 내가 생각한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 더 이상 내면 아이의 슬픔을 간직한 어른이가 아닌 아이다움을 간직한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