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命名) 대해 속에서

무명 씨의 설움

by 수인
드디어 개명하고 광명 찾다


우연히 만나 노트북을 찾아주신 아주머니께서 개명을 권유하셨지만 그 말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유인즉슨, 나는 예전의 내 이름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한글로만 이루어진, 반짝반짝 빛나는 물결이라는 뜻의 내 이름을 사랑했다. 사실 개명하라는 이야기는 이 이전에도 두 번이나 더 들었다. (그렇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때때로 점도 보는 나약한 인간이다.) 하지만 사주를 보든 점을 보든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원하지 않는 결괏값은 의지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이름도 끝끝내 바꾸지 않고 십여 년을 버티고 있었다.


이런 고집불통의 나에게 신은 제발 이름을 바꾸라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걸까? 미술계에 들어오기 전에 잠깐 다니던 회사에서 부당 해고를 당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기에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럼에도 쿨하게 (비자발적) 퇴사 여행을 다녀온 후 이름을 바꾸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쯤 되면 밑져야 본전이다 심산이었다. 그렇게 내 이름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데… 해고도 당한 마당에 그래 바꾸자! 내 이름을! 내 운명을(?!)


유명하다는 작명소에 찾아갔고, 대번에 그분은 지난 십 년 동안 인생이 정체되었을 것이라며 내 눈물샘을 자극했다. 부르는 게 값인 다른 작명소에 비해 몹시 소박한 가격에 어쩐지 믿음이 가는 그분의 말씀에 나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좋은 인연을 끌어당긴다’는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갑자기 미술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미술계의 무명 씨


'000 큐레이터님께'로 시작하는 메일을 보자마자 무언가 부적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내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는 것을 시리도록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메일을 보낼 때도 이런 나의 직함을 적시하고 있고 명함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며, 소개할 때도 나는 꼭 '어시스턴트'를 앞에 붙여 말한다. 그럼에도 작가님이나 거래처 사람들, 혹은 사적으로 만나게 되는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큐레이터'라고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럴 때면 사실 불편한 감정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큐레이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가 아닌데 큐레이터로 불린다는 게 어쩐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물론 상대방의 의도는 다양할 것이다.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부르기에는 너무 길어서 뒷부분만 불렀을 수도 있고,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와 큐레이터의 차이를 몰라서 그냥 아는 직업의 이름을 말했을 수도 있다. 혹은 괜히 '어시스턴트'자를 앞에 붙이기 미안하거나 나를 존중하는 의미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상대의 의중은 다양할 수도, 혹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큐레이터라고 불리는 데에 대해 움찔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그 직업에 대한 존중일까 아니면 큐레이터라는 이름에 대한 단순하고도 복잡한 열망일까.


마치 내가 자격이 없다는 이러한 느낌은 이전에 있었던 미술관과 외부에서 전시기획을 직접 했을 때도 경험했다. 전시를 기획하면 큐레이터라는 이름을 달아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기존 미술계가 세워놓은 엄격한 질서랄까 위계랄까 이런 것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나는 큐레이터 혹은 전시기획자가 아니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어찌 되었건 지금 있는 미술관에서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니까,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가기 위해 일부러 들어온 거니까. 나는 내 사회적 이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름이 가지는 위력은 내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나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이기 때문에 학예 회의에 일 년 넘게 참여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무척 이상해서 다른 기관 큐레이터 분들께 물어봤더니 어떤 큐레이터 분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했고, 다른 큐레이터 분은 기관의 성격마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그렇게 하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는 회의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큰 그림 속에서 내 일에 대한 가치와 필요성을 규정하고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또, 어시스턴트이기 때문에 때때로 작가 미팅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외부 강의를 나갈 때도 ‘네가 뭔데 강의를 나가?’라는 물음이 담긴 눈빛과 이런 뉘앙스의 말을 들어야 했다.


무언가를 명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비전공자이자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직업적 이름을 달고 일하는 나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는 불안정한 이름 때문에 난감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저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예요~ 그게 뭐냐 하면요~"하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큐레이터가 넘쳐나는 세상에 내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보면 큐레이터라고 명시하고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고 검색하면 잘해야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다. 나는 이러한 구조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과정 속에 있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는, 그 이름의 보조적인 뉘앙스 (이자 사실)와 한시적이라는 태생적 특성과 한계 때문에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혹은 드러낼 필요를 다들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의아함 속에 나는 자신 있게 (는 절대 아니다) 내 개인 소셜 계정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 소개했고, 글을 쓸 때 ‘글 쓰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는 해시태그를 달기도 한다. 내 직업적 이름이 나를 한계 짓기도 하지만 잠깐 머무는 직업이라도 나는 나를 소개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나를 말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 미술계의 무명 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네 이름을 꼭 드러내야 하겠냐고. 큐레이터든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든 작가와 작품과 전시를 돋보이게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걸 모르고 이 세계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작가님들의 작품이 잘 전시되면, 또 같이 일했던 작가님들이 종종 전시 소식을 전해주시며 잘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쁘고 보람 있다. 하지만 사람은 보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정적 보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명 씨로 일하며 사는 게 그 감정적 보상을 상당 부분 깎아 먹는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나를 다시 일 속에서 잃어야 한다는 게 서글펐다. 나를 찾기 위해 들어온 곳에서 나를 찾기는커녕 이름조차 불안정한 게 힘들었다.


나는 그래도 나야

다시 이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실 좋은 인연을 끌어당긴다는 내 이름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길 바라는 엄마의 염원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좋은 배우자를 만났냐고 물어본다면 아직 아니올시다. 희망은 하고 있다. 그런데 그전에 좋은 남자 친구가 나타나면 좋겠다. 여하튼간에 이름이 바뀌어서 좋은 배우자 대신 원하던 곳에 취업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변했냐 하면 아니다. 생각을 좀 더 긍정적이고 유하게 먹으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언제나 그대로 있다. 즉, 이름이 바뀌어도 나는 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내 사회적 이름에도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 나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이지만 그 허물을 덮고 있어도 혹은 벗어버려도 나는 나다. 다른 사람이 큐레이터라고 부르든, ~씨라고 부르든, 직원이라고 부르든,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라고 부르든 나는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건 내 정체성의 일부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MC, 작가’ 나는 개인 SNS에 이렇게 나를 규정해 놓았다. 이렇게 세 항목으로 나를 정의 내리면 정체성에 관한 나의 불안이 가시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다면 정말 나의 불안이 가셨을까? 내 삶은 이렇게 직업적인 단어들로만 이루어졌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문득 어쩌면 조금 편협하게 내 삶을 단정 지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다. 약자를 보면 도와주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늘 꿈을 꾼다. MBTI에 빠져 있으며 INFP 답게 부끄러워하는 관종이다. 뮤지컬을 좋아한다. 내적 흥이 많다. 그런데 겉으로는 새침해 보인다. 낯을 무척 가리지만 친해지면 수다쟁이이다.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행복해하고 있다. 하늘, 구름, 꽃, 강아지, 고양이, 아기, 초여름의 선선한 저녁, 초가을의 반짝이는 아침, 비 온 뒤 무지개를 사랑한다. 직업이 아닌 나를 나타내는 특성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는 그간 직업과 직업적 특성들로만 나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내가 얼마나 다채로운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데 나를 그렇게 꽁꽁 가두려고 했을까.


나는 더 이상 사회적 이름에 내 개인적 자아까지 함몰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차피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진 말랑한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니까. 사회적 자아도 중요하지만 이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사회적 자아 뒤에 숨겨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간직하며 드러낸다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혹은 누가 아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든 큐레이터든 상관없이 내 이름 석 자가 당당해지는 날이 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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