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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Dec 30. 2021

D-1 이 감정은 대체 뭐지?

견딘 시간들이 서러워

내 마음이 이상해


퇴사하기 하루 전 날,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예의 공허한 슬픔이 밀려왔다. 지난 회사에서도 끈질기게 겪었던 마음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슬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고 그 깊이도 알 수 없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눈물을 참으며 걷고 또 걷다가 결국 집에 와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바라 왔던 퇴사를 하루 앞둔 날, 축제의 밤이 펼쳐져도 모자랄 판에 눈물이 흐르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내게 끊임없이 물으며 울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견딘 시간들이 서러워.'


퇴사를 한 달 여 앞뒀을 때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여전히 지루하게 늘어지는 회사생활을 견디다가도 문득 아, 나 곧 퇴사하지?라는 생각만 하면 희망적인 설렘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일방적으로 애정을 잔뜩 주었던 미술관 고양이들에게 미리 작별인사를 하고 회사 근처 샌드위치 맛집을 뒤늦게 알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영원에 가까울 시간만큼 이곳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눈 덮인 미술관의 전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한 달 전부터 방안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미며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것처럼 날을 세어가며 나만의 축제인 퇴사 날을 기대했다.


크리스마스의 기대


크리스마스 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아마도 일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다니던 유치원에서 원생들을 한데 모아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아이들은 흥분과 설렘을 가득 안고 돌아다니는 산타가 자신에게 선물을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칠 년이라는 시간이 긴 꿈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한 조숙한 어린이였던 나는 이 상황에 당최 빠져들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산타할아버지(가 아닌 산타 이모)가 엉성하게 붙인 숨이 푹 죽은 수염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 XX 선생님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크리스마스에 진짜 산타를 만나게 될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번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아닌 산타 삼촌)가 "띵동!" 경쾌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짐짓 속아주는 체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두 살 터울의 내 동생은 산타할아버지가 자신이 일 년 동안 저지른 만행(?)을 줄줄이 읊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겁에 질려있었다. 이것까지 속아주기엔 너무 되바라졌던 나란 어린이는 옆에서 '엄마 아빠가 보낸 게 확실해'하며 잠자코 서 있었다.


지나치게 관찰력이 뛰어났던 아이는 크리스마스를 밤을 새우며 기다리는 그런 기대감을 전혀 가질  없었다. 기대가 없었기에 설렘도 없었지만 실망도 없었다. 내가 잘못을 했든  했든 크리스마스는 돌아오는 거고, 선물이야 엄마 아빠가 사주시는 거고. 어린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특별히 들뜨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날이었다. 그런 무던한 감각을 견디며 성인이 되었다.


기대라는 허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보니 기대가 없으면 까만 밤 같은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걸까, 사회는 올바른데 내가 삐딱한 걸까 자기 검열을 견디지 못해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쾌활한 빨간 머리 앤이 되어 오지 않은 행복을 기대란 이름 속에 심어두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꿈에 착륙했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행복은 사실 실망과 상처라는 가시덤불을 헤쳐야지만 겨우 보이는 장미 꽃봉오리 같은 것이었다. 아직 피지도 못한 그 꽃봉오리를 찾아 용감하게 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행복의 실마리라도 찾아내 내가 꽃피워보리라. 하지만 꽃을 찾아 뛰어든 용맹한 나비 한 마리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날개가 찢겨버렸다.


나비는 잠시 쉬어가야겠노라고 생각했다. 기대라는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들었지만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난 잠시 물러서서 찢어져버린 날개를 꿰매고 피가 난 곳에 약도 발라주면서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이렇게 다짐한 나비는 초라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림이 들려왔다. 더 이상 기대하고 싶지 않아. 견뎌온 시간들이 너무 아파. 그렇게 한 달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오던 나만의 축제 문턱에서 발이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몰아치는 서러움 속에 웅크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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