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쓴 '초월적 관계'에 대한 단상
다투듯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 미친나. 니 와이카는데. 참말로, 환장하겠네. 문디 가스나야. 지라..' 억센 억양과 거친 표현의 밑바탕에는 세상 둘도 없는 다정함과 따스함이 있다. 고마 하라고 펄쩍 뛰며 등짝 한대 철썩 때리고는 깔깔 웃으며 팔짱 끼고 밥 먹으러 가는 엄마와 이모들의 대화가 그렇더라. 참고로 외가 고향이 대구다.
대화하듯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차분한 말투에 감춘 속내, 상대의 의견을 제압하고 뿐만 아니라 마음 속 온기까지 압살 하고야 말겠다는 싸늘한 맹수의 눈빛, 팽팽한 긴장의 연속. 사이사이 피식, 피식,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듯 빈정대며 솟아오르는 비소로 가중되는 살얼음판. 자주 보는 상황은 아닌데 간혹 있다. 작년까지 다녔던 매거진 만들던 회사에서 회의 때 몇 번 목격했다. 저런 자리에는 잘 끼지 않고 침묵하는데, 어쩔 수 없이 내가 개입되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내가 이겼다고 느낄만한 최후의 결정타를 그 날, 아니면 나중에 단 한 방이라도 날려줘야 속 시원한 나다. 그래서 싸움을 싫어한다.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 너무나 피곤한거거든.
말없이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날 봤다. 나 포함 네 명이 앉은 그 술자리. 그중 두 명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액수는 4천만 원. 누군가에게는 큰돈이고,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이겠지만, 나에게는 큰돈이다. 그날 마주한 채권자와 채무자에게도 그것은 큰돈인 것 같았다. 채무자가 약속한 상환기한이 한참이 지나도록 이자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상황에, 채권자가 화가 나서 그를 고소했으니까. 나라가 화가 난 채권자의 손을 들어줘 채무자는 벌금형 확정. 그러니까 큰돈이다. 그리고 집행이 확정된 그날, 둘은 술자리를 가졌다.
맹하게 내가 물었다. 고소 취하하구, 합의금 받고 빚에서 탕감해주면 안돼요? 그랬더니 안된단다. 고소를 이미 했기 때문에 무조건 법원에 벌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법으로도 안된다고. 그게 뭐지. 어쨌든, 나라는 채권자의 편은 아닌 걸로. 나라는 그냥 세금과 벌금을 걷는 곳일 뿐. 근데, 어떻게, 본인에게 생기는 득도 없는데 벌금형을 먹일 만큼 감정이 상한 상태로 술자리에서 대면을 했지. 두 사람 뭐야.
"대학 선후배, 그리고 전 직장 선후배."
네 명 중 채권자도 채무자도 나도 아닌 나머지 한 사람이 말했다. 수수께끼가 약간은 풀린다. 학연과 지연으로 묶인 애증(?)의 관계. 사랑과 전쟁의 선후배 버전인가.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그럼 두 사람의 그날 대면은 화해의 시그널인가 휴전의 선언인가.
"초월적인 관계."
이번에도 네 명 중 채권자도 채무자도 나도 아닌 나머지 한 사람이 말했다. 근데... 고소했다며. 초월은 무슨. 금전관계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대체 뭘 초월했다는 거야. 아. 그래. 상식의 한계를 초월한 건가. 나는 그 관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 내 이해력을 초월하는 관계라고.
스쳐가는 기쁨과 슬픔에도 오만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데 오랜 지인으로 지낸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겠어. 내가 알지 못하는 오만가지 이유와 사정들로 얽혀 있겠지. 나는 말없이 싸우면서 나란히 술을 마시는 그들을 의식하였고, 이따금씩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입술에 맥주를 야금야금 적셨다. 그날의 술값은 채권자가 냈다. 채무자가 그 날 3만 원을 상환했는데 그 돈으로 냈다. 채무자가 낸 돈으로 술을 산 것이니 채무자가 낸 것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 돈은 채권자의 돈이었으니, 최종적으로는 채권자가 낸 게 맞다. 소크라테스라면 둘의 관계에 순서나 우위를 점하기에 앞서 너 자신을 알라며 나의 맥주잔을 채워줬겠지. 그날의 장면은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찌질하고 사연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단편소설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감상을 뛰어넘는 채권자의 빅 픽쳐(큰 그림)가 있을지도. 그러면 곧장 장르는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댄 브라운으로 바뀐다. 채권자가 채무자를 감시하여 자신의 손아귀... 고개를 휙휙 젓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무섭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다만 결심할 뿐이었다. 나는 절대 돈 빌려주지 말아야지. 그냥 주면 줬지, 빌려주지는 말아야지. 형제간에도, 엄마에게도. 미안해 엄마. 엄마는 나에게 그토록 많은 돈을 주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줄 돈이 없어. 왜냐면, 정말로 줄 수 있는 돈이 없거든.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