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될 수 없는 네온 사인, <사이버펑크 2077>
중력을 느껴본 적 있을까? 대학생 때 번지점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뛰어본 적 있다. 그 전까지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떨어진다는 경험은 남달랐다. 처음 떨어질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가 튕겨 올라갔을 때 느꼈다. 어떤 거대한 힘이 나를 힘껏 잡아당긴다는 느낌.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그 당연한 사실을 직접 몸으로 느끼자 세계는 달라 보였다. 어렵게 말했지만, 그 이후로 높은 곳을 겁내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탈 때 바깥 창문을 잘 보지 못한다.
<사이버펑크 2077> 이란 게임이 있다. 나이트 시티와 그 일대를 살아가는 'V ' 라는 인물이 되어보는, RPG 다. 이 게임 속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도시를 탐험하고, 여러 의뢰를 해결하며 점차 이 도시에서의 전설이 되어간다.
이번에 2.0 패치 업데이트와 함께 확장판인 팬텀 리버티가 출시해서 재밌게 플레이 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여러 플레이 영상을 보다보니 정말 말도 안되 성능의 무기와 스킬 조합으로 결코 죽을 수 없을 듯한 빌드를 보았다. 도시 치안을 담당하는 NPC 중 가장 강하다는 맥스텍 마저도 녹여버리는 그 빌드를 보고 있자면 도대체 이 도시에서 무서운 게 무엇인가, 내가 조종하는 V가 사실은 이 세계 속 재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다가 중력이 생각났다. 맥스텍(게임 내 가장 강한 경찰 병력)이 썰려나가고, 터져나가는 그 와중에 나이트 시티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게임 속 세계니까 도시가 불타오르거나 붕괴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V는 거기까지다. 최강자는 될 수 있지만 조니 실버핸드(게임 영상에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가 바로 이 캐릭터. 반골 기질 넘치는 락커다) 처럼 아라사카 타워에 핵폭탄을 설치할 수 없다. 빌딩을 날릴 수 없다. 사람들의 힘을 모아 도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 체계를 세울 수 없다.
나이트 시티에 가장 유명한 술집, 애프터 라이프(After Life) 에서는 전설이 된 자들이 즐겨 마시던 칵테일 조합을 그의 이름을 붙여 판매한다. 나이트 시티에서 허용된 자유는 거기까지다. 아라사카와 밀리테크(나이트 시티를 지배한다고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회사 두 곳이다) 는 계속 존재할 거다. 나에게 일거리를 주는 픽서들은 변하지 않을 거다. 허용된 건 전설이 되는 일 뿐이다.
아무리 강해도 뭉쳐지지 않은 나는 강한 개인일 뿐이다. 도시는 전설을 잡아먹으며 커갈 뿐이다. 무슨 게임 하는데 세계를 바꿀 필요까지 있을까? 결국 선택이다.
전설이 되고자 하는가? 아니면 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도시에서 살건가? 어떤 삶이 더 나은가? 고를 수 없다. 어차피 누군가가 깔아놓은 철길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이다. 이 지옥같은 답답함을 벗어나려면 그냥 2호선을 내리는 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