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은 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매력적인 작가이다. 앞으로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몇 차례 더 다루게 될 텐데, 이야기의 소재와 구성이 독특하다는 점, 이야기마다 주제가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작가들이 같은 이야기를 다른 모양으로 반복해서 짓는다는 점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작가가 틀림없다. (존 어빙이 『일년 동안의 과부』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난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나는 안데르센의 「미운 아기 오리」, 다른 하나는 『오즈의 마법사』이다. 앞에서는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기 이해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야기를 했고, 뒤에서는 함께 이루어가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 행복에 대해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어느 날 추운 겨울에 소녀는 밖으로 쫓겨 나온다. 이유는 성냥을 팔기 위해서인데, 아버지가 소녀에게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소녀는 추운 겨울에 밖으로 나와서 성냥을 팔지만 아무도 성냥을 사지 않는다. 그러다가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성냥을 하나 켜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된다. 소녀는 세 번째 성냥을 켤 때 죽은 할머니를 보게 되고, 결국 소녀는 죽음을 맞이한다.
안데르센은 이 소설을 1845년 12월에 발표했다. 당시의 유럽의 상황을 살펴보면, 사회는 산업화로 인해 너무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그 변화를 적응하는 일은 개인에게 맡겨졌다.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배고픔과 어려움이 시달리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동의 노동착취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이것을 금지하는 법안은 꽤 나중에 만들어졌다. (영국의 경우 1842년 법안이 만들어졌다)
산업안전근로감독관 출신의 강태선 아주대 교수는 “안데르센의 비극적 동화의 주인공은 당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다 산재를 당하고 쫓겨난 아이들”이라며 “아이들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공장에서 돈 대신 성냥을 손에 쥐여 내쫓았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성냥팔이 소녀는 집에서 내몰리자마 하루 만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소녀가 죽음을 그렇게 일찍 맞이하게 된 것은 소녀의 건강하지 못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안데르센은 소녀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소녀는 성냥을 하나씩 켤 때마다 환상을 본다. 환상을 보는 모습은 의식이 흐려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짧은 시간만 타고 꺼지는 성냥의 모습에서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성냥팔이 소녀」는 불행에 대해서 다룬다. 이 불행은 소녀 개인의 잘못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인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선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사회가 조금 더 개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