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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ytowin May 14. 2019

‘완벽한 괴물'이 주는 공포…그 뿌리를 찾아서




한동원 영화평론가 비평



인천남고에서

인천남고에서 독서토론대회를 진행하니,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었다. 나는 학생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고민하지 않고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이야기를 드렸다. 수업은 4주 동안 진행되었다.


첫 수업에는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서 다룬다. 내 수업 방향과 진행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시간이 된다. 그때에는 <에일리언: 커버넌트>가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었는데, 영화를 통해서 철학적 해석학을 다루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리고 평론가가 이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논의를 더하는 것이, 철학적 해석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었고,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1편 <프로메테우스>와 『프랑켄슈타인』을 함께 보면 도움이 될 거라 짧게 이야기를 하고, 한동원 영화평론가(이하 평론가)가 쓴 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함께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평론가가 쓴 글은 꽤 긴 글이다. 학생들은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서 읽는 것을 곤란해했다. 나도 곤란했다. 왜냐하면 도대체 무슨 글을 읽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두서없이 쓰는 글도 한겨레라는 큰 일간지에도 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앞부분은 영화에 대한 줄거리를 최대한 감추면서 영화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고, 제목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하는 과정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은 다음과 같다.



평론가의 결론 - 부성父性의 공포

"창조물이 주는 공포

그런 의미에서도 <커버넌트>는, 리플리가 아직 ‘모성’을 각성하지 않았던 1편의 후계자다. <커버넌트>의 공포는 ‘모성’이 아닌 ‘부성’에서 온다. 1편의 공포의 뿌리는, 에일리언이라는 괴물보다는 그 괴물이 압착해 낸 우리 내부의 어둠에 있었다. 합성인간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나자 싸늘한 냉소와 함께 “너희들은 이 완벽한 생명체의 손에 모두 죽는다”는 말로 창조주인 인간들을 비웃고 경멸하는 합성인간 ‘애시’(이언 홈)가 건드린 것은 바로 오이디푸스적 공포다. 그리고 <커버넌트>의 합성인간 월터/데이빗은 바로 그 공포의 계승자이자 사도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물이 주는 공포가 현실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창조 행위를 멈출 수 없는 현재의 인류가 막연히 품고 있는 공포와 정확히 공명한다." <한겨레 토요판>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찾은 결론은 이렇다. “이 영화의 공포는 ‘부성’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그러니까 이 영화를 분석하는 평론가는 ‘부성’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평론가가 집중하고 있는 부성이란 무엇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거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토템과 타부』에서 말하는 그런 부성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 관념에서 온다고 하는 것인지 평론가는 언급하지 않았다.



설마... 연기자가 남성이라서?

설마... 정말 이건 설마이다. 설마 캐릭터가 남성이라서? 에일리언을 창조하는 창조자의 역할을 남성이 담당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제발 부탁이다. 정말. 만약에 그런 거라면 정말 이건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념은 우리의 생각보다 아주 깊은 곳에 닿아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글을 올리려고 이미지를 찾다가 포스터를 발견했다. 설마, 이 포스터 인상 때문에 평론가가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팍스무비 홈페이지에도 없는. 제발).



설득을 위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하다

사람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가깝다. 인간은 어떠한 것도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없고(내가 공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이야기’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곳이다), 이전의 것을 모방할 수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천병희 역)


<에일리언: 커버넌트>를 부성이 주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가고 싶다면, 그러니까 이런 아이디어가 스스로가 만든 단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풀어가고 싶다면, 그리고 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근거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프로이트를 끌어와야 하는 게 맞다.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평론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진심으로 미안하다. 평론가는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겠지만, 새로운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근거가 빈약하니까. 평론가의 생각이 고전에 근거하고 있는 것도, 인간의 심연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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